그림일기를 빌려 쓰는 까닭
끝이 분명한 우리는 살아가면서도 죽어가고 있으며 만나고 있지만 헤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작별을 할 기회는 삶이라는 시간 속 언제고 존재하였을 뿐, 도리어 영원하기만을 바라다 맞닥뜨린 이별은 보다 오래도록 쓸쓸한 슬픔으로 새겨지곤 했다.
몇 해 전 초여름의 어느 날 나는 소아청소년과 1년차였고 새벽까지 응급실에서 진료를 하고 있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날이 밝으면 내려와라."
엄마와 통화를 마쳤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태연하게 밤샘 당직을 끝내고 아침 회진까지 마친 뒤 병원을 나섰다. 집으로 가는 차창 너머 요란스러운 빗방울을 바라보다 깊은 잠에 들었고 어둑해질 무렵 여름비를 첨벙 대며 낯선 장례식장 앞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정신이 또렷해졌다.
기억 속 할머니는 언제라도 교회에 가실 요량으로 짙은 외투를 겹겹이 껴 입으신 채 아랫목에 앉아 계시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할머니께 인사드리라며 외삼촌이 이끈 곳은 낯설 만큼 화사한 한복을 입고서 엷은 미소를 짓고 계신 영정 사진 앞이었는데 그제야 할머니가 돌아가셨음을 아주 조금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별은 곧 할머니의 육신이 곱게 싸이던 날 비로소 실체를 드러냈다. 할머니는 더 작고 차가웠고 더 이상 보드랍지 않았다. 울퉁불퉁 굽이진 손가락 마디들은 참으로 굽이졌던 그녀의 삶처럼 느껴졌다. 많은 자녀들과 손주들의 손이 그 위에 마지막으로 포개졌고 나는 할머니의 고된 삶이 종국에는 복된 희생이었다고 위로했다.
딸.
상순.
장샌댁.
권사님.
아내.
며느리.
엄마.
할머니.
증조할머니.
많은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이름으로 남은 상순 씨는 닳고 닳은 손마디를 벗고 작은 재가 되었다. 긴 긴 슬픔의 시간을 이겨내고서 할머니도 우리도 아주 조금 홀가분해졌을 때였다.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삼촌 두 분 사이 분위기가 험악해지며 언성이 높아졌고 급기야는 한차례 주먹질이 일어났다. 마지막까지 평안할 수 없었던 할머니가 못내 불쌍해 오래도록 서러웠다.
마음이 모가 난 채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다. 할머니를 만나러 갈 때와는 달리 유난히도 푸르렀던 그때 그 시골 풍경은,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는 영영 떠났으며 지금 이 순간도 떠나고 있다는 사실을 낯설게 했다. 그녀의 죽음도 탄생도 품은 젊은 계절이 몹시 역설적으로 느껴졌다.
할머니가 떠나고 사계절을 꼬박 네 번 지나 또 한 번의 여름을 맞이한다. 근래 집에 다녀오는 길, 고요한 녹음에 시선을 두며 잠자코 할머니 생각에 머물렀다. 오래도록 그녀를 그리고 기리고 싶었다. 누구보다 열정이 가득했고 자랑하는 걸 즐거워했던 할머니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스스로를 이야기하고 싶어 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나는 할머니의 삶을 빌려 상순이라는 사람이 살았다는 기록을, 할머니가 내게 들려주고 보여 주고 가르쳐주었던 모든 것을 차근히 남겨보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