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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구르르 Oct 06. 2021

삶이 모든 주제와 함께 흐르기를

집착에서 벗어나 주변을 둘러보며 살아가는 법에 대하여


      여행을 떠날 때는 푸른 논을 보며 달렸는데 돌아오는 길에는 벼가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다.   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집은 반가우면서도 낯선 모습을 하고 있었다. 뭐가 달라졌지? 여행에 나서기  대청소를 하면서 이것저것 비우고 화분의 위치를 바꿔서 그런가, 갸웃하면서도 달라진 점을 찾지 못했다. 밀린 집안일로 한바탕 부산을 떨고 의자에 앉아 여행 중에 사 온 책을 어디에 꽂아야 하나 책장을 보면서 깨달았다. 책장  칸에 꽂힐 책이 달라져야 했다. 책은 사기는 쉬워도 버리기는 어려워서 책장은 까딱하면 정체되기 마련인데, 이럴 때마다 목욕물 받을  온수와 냉수를 섞는 것처럼 책을   섞어주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상 필요하지 않은 책은 솎아내고 중요도에 따라 위치를 바꾼다. 책장의 가장 위칸은 바로 눈이 가는 자리로 가장 손이 많이 가는 , 가까이 두고 읽어야  필요가 있는 책을 두었는데 오랜 기간  자리는 몸과 마음 건강에 대한 책들이 지키고 있었다. 일을 시작한 이후로 함께 해온 관절 시림, 처음에는 작은 씨앗으로 서서히 고개를 들어 이제는 마음의 주인처럼 활개 치는 우울감 때문이었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아도 되는지에 대한 생각, 몸이 보내는 신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고민, 우울감은 습관과 호르몬의 영향*이라는 사실을 되새기지 않으면 힘들었던 것이다.



여행을 하는 중에는 지지부진한 매일의 고민거리에서 벗어나 남이 해주는 밥을  먹고 챙겨주는 이부자리에 눕기만 하면 되었다. 다른 말로는 오로지 나의 기쁨, 즐거움을 탐구할 시간이 주어졌던 것이다. 건강에 대한 걱정과 염려를 얕게나마 걷어내고 찾아낸 나의 진짜 관심사들은 믿을  없이 다양한 곳에 닿았다. 수영장에 들어갔다 나온 후에 발갛게 상기된 얼굴들, 보통의 결혼 생활, 섹스 없는 사랑, 욕구 뒤에 가려진 욕구, 버려지지 않아도 되는 흠과, 분더카머**. 모두 각각의 이유로 흥미롭고 즐거운 독서였다. 건강에 대한 책을 들어내자 마음 한편이 가벼워졌고,  자리를 새로운 책들로 채워 넣자 주위가 환기되는 기분이 들었다. 비로소 그동안 고통  자체에 치중한 나머지 다른 것에는 눈을 가리고 살아온 것이 보였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환경이었던 것은 맞지만 그것을  자신과 동일시할 필요는 없었는데 통증과 비관이 익숙해지자 그것을 몸의 일부분처럼 가는 곳마다 끌고 다니느라  지쳤던 것이다. 책을 읽으며 통증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습관은  고착화되었다. 건강을 갈망하며 현재 나의  상태를 불건강으로 정의하는 순간, 나에 대한 부정성은 더욱 커지고 건강한 몸에 대한 욕구는 더욱 커지는 굴레에 빠졌던 것이다.


     위빳사나 명상을 하고 나자  점은 더욱 명료해졌다. 위빳사나 명상에서는 유쾌한 감각이든 불쾌한 감각이든 모든 감각의 본질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며, 감각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내가 만들  없으므로 평정심을 지키며 이것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고 한다. 사람은 보통 감각을 받아들이는 즉시 그것에 대한 반응을 하게 되고 이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채로 반응을 유지한다.  패턴이 굳어지면 습관적으로 감각에 대해 반응하게 되는데, 나의 경우 관절 시림이 그랬다. 처음에는 시린 것에 불편감을 느꼈고 시간이 지나 시림의 정도가 심해지면서 그것이 통증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오랜 기간 시린 감각이 지속되자  이상 시려서 아픈 것인지, 아파서 시린 것인지, 시리고 아파서 불쾌한 것인지 알아차릴 새도 없이 관절 자체에 대한 부정적 감각과 이에 대한 반응만 남은 것이다. 온갖 방법을 써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관절 시림은 더욱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는데, 진단검사 결과가 정상으로 나올 때마다 원인을   없으니 진료실에서는 정말로 미친 사람 취급을 받기에 이르렀다(상세불명의 ㅇㅇ이라는 질병을 가진 여성이 그러하듯, 나도 정신과 치료를 권유받았다). 병원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질병이라는 사실에 대한 좌절은  통증이 공인받지 못하는 외로운 싸움이라는 감각을 키웠고, 그때 붙잡을  있는 것이라고는 건강에 대한 책뿐이었다. 



  건강에 대한 책을 한 편으로 옮기고 관절 시림/통증을 수많은 감각 중에 하나로 인식하기 시작하자 놀랍게도 증상은 완화되었다. 뛸 듯이 기쁜 감정은 조금 누그러졌지만 그만큼 어둠으로 향하는 마음도 어느 선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손목을 잡아보면 여전히 몸의 다른 부분보다는 차갑지만 그 즉시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내기 전에 잠시 그 감각을 바라본다. 손목이 시리구나, 이것은 틀고 앉아 뜨끈해진 발바닥과 똑같이 언젠가는 사라질 감각이다. 감각은 내가 아니고, 감각은 나의 것도 아니며, 그저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감각에 대한 관찰, 기민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관찰뿐임을 되뇌면서. 사람이 느끼는 감각은 각자 다를 수밖에 없으므로 이 감각을 인정하지 않은 타인에 대한 분노도 많이 누그러졌다. 그러자 우울감의 탈을 쓰고 안에서 꿀렁이던 분노와 혐오감도 몸집이 작아졌다. 건강에 대한 책은 여전히 책장에 꽂혀있다. 하지만 관절 시림이 내 몸에서 느껴지는 다른 수많은 감각 중에 하나이듯, 이 책들이 나의 책장을 이루는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이 명확히 보인다. 역설적으로 건강에 대한 욕구, 눈을 가리는 지극히 파편적인 갈망을 내려놓은 지금에서야 건강에 대한 책들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굴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읽을 수 있기도 하다. 이제 나는 기대한다. 책장 윗 칸에 더 다양한 책들이 꽂히기를. 건강뿐 아니라 다른 어떤 주제도 흐르는 삶을 막지 않기를. 나의 삶이 그 모든 주제와 함께 흐르기를.



*

조한진희,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동녘, 2019

게이버 메이트, <몸이 아니라고 말할 >, 김영사, 2015

엘릭스 코브, <우울할  뇌과학>, 심심, 2018


**

매들린 월러, <수영하는 사람들>, HB Press, 2019

임경선, <평범한 결혼생활>, 토스트, 2021

에스더 D. 로스블룸. 캐슬린 A. 브레호니, <보스턴 결혼>, 봄알람, 2021

캐럴라인 , <욕구들>, 북하우스, 2021

<Sustain-eats 2호: 먹지 않은 것들>, 공공책방, 2021

윤경희, <분더카머>, 문학과 지성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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