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들로 희석하는 수밖에 없다
<경양식 집에서>를 읽고
굿즈 모으기에 열 올렸던 때가 있었다. 책을 고르고 계산하기 전에 보이는 굿즈들의 향연은 그냥 지나치기 힘들었다. 틴케이스에 담긴 빨간 머리 앤 일러스트의 책갈피며 따옴표가 그려진 인덱스가 어찌나 매력적이던지. 책의 특성에 따라 종류도 다양해서 박막례 할머니의 레시피 북에는 양은 쟁반이, 와인 책에는 와인 푸어러가 따라 나오니 온라인 서점마다 굿즈를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요즘 들어서는 굿즈 구경이 조금 뜸해졌는데 얼마 전 연말 정산에서 문화비로 찍힌 금액이 적지 않아서다. 작년에는 공연을 보러 간 것도 손에 꼽으니 책의 몫이 못해도 90프로일 테다. 도서관을 좀 더 자주 이용하겠다는 굳은 결심에도 불구하고 홀린 듯이 주문 버튼을 누르게 되는 책(그리고 굿즈)이 있다.
이번에 받은 굿즈는 하얀 머그컵이다. 글과 사진, 만화가 함께 있는 책의 특성을 살려 만화 한 컷이 네모난 칸 안에 그려져 있다. A4용지 크기는 될 법한 메뉴판을 진지한 눈으로 읽는 남자의 얼굴 위쪽이 빠꼼 보인다. 식탁 한 켠에는 후추통, 타바스코 소스 병, 냅킨꽂이로 유추되는 것들이 작은 쟁반 위에 놓여있다. 뒤로 보이는 시계로 미루어보아 늦은 점심식사인 듯하다. 머그컵은 지름에 비해서 높이가 낮은 편인데 그래서 귀여운 느낌을 준다. 손잡이 부분에 모래처럼 튀어나온 부분이 있거나, 난데없이 갈색 잉크가 점찍어져 있는 걸 보면 마감이 깔끔한 편은 아닌데 오히려 그 점이 더 정감 있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1,600원 상당의 포인트로 어디서든 경양식 집에 앉아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만화 아래 군더더기 없는 글씨로 <경양식 집에서>라고 적혀있기 때문이다.
28년 경력의 피아노 조율사인 작가는 보통 미식가가 아닌 듯하다. 소스 맛의 차이로 재료를 유추하기도 하고, 직접 만들지 않은 수프는 숟가락을 대지 않기도 한다. 현 하나 갈자고 옆 도시로 출장을 가는 건 수지타산 맞지 않는 일일 수도 있지만 근처에 경양식 집을 생각하며 의뢰를 승낙하기도 한다. 책을 읽다 보니 이 분이 28년의 세월 동안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돌아다닐 수 있었던 원동력은 각 도시에 자리한 경양식집과 중국집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저자는 비슷한 형태로 <중국집(피아노 조율사의 중식 노포 탐방기)>라는 책을 낸 적이 있다). 나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내일 점심은 얇게 두드려 편 한국식 돈까스로 하자, 기대하며 주말이 끝나는 아쉬움을 달래 본다. 굿즈로 받은 머그컵을 사무실에 두면, 빌딩 숲 보며 마시는 회사 커피도 경양식 집의 후식 인척 마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좋아하는 것들로 조금씩 희석하며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