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닥꼬닥 혼자 또는 함께 걷는 올레길 2코스
### 성산에서 광치기 해변까지, 1코스 완주
쓰지 않던 몸에 패기를 잔뜩 두르고 무작정 걸었던 첫날. 무거운 짐을 들고 요령 없이 다녔던 게 힘이 들었는지 여독이 풀리질 않아 늦게까지 단잠을 잤다. 어제 걸었던 1코스의 마지막 부근에서 2코스까지 가야 하는데 사각이는 이불이 어찌나 발목을 붙잡던지. 휴식의 유혹을 간신히 뿌리치고 숙소 밖으로 나섰다. 어제와 다르게 하늘에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맑은 날씨 덕분에 바람막이(라 쓰고 땀복이라 읽는다) 입은 걸 조금은 후회했다.
성산일출봉 앞 식당가를 어슬렁거리며 아침을 먹을까 말까 고민하며 바닷가 쪽으로 걸어 나왔다. 여기서부터 광치기 해변까지 쭉 걸어 나가면 1코스 종료 지점이자 2코스 시작 지점이 나타나 어제의 못다 한 일정이 마무리된다. 광치기 해변으로 향하는 길은 성산일출봉을 뒤에 두고 걷게 되는데 중간에 계속 뒤를 돌아보게 할 정도로 참 이국적인 풍광이었다.
길쭉하게 펼쳐진 바닷가를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레 광치기 해변에 들어선다. 해변의 끝자락 즈음엔 길 건너 유채꽃밭이 보인다. 2월에 부모님과 왔던 유채꽃밭을 이번엔 혼자 가볼 생각에 신나서 걷다 보니 어느새 1코스의 종료 지점이 나타났다. 어제는 걸어오라고 해도 못 왔을 광치기 해변의 간세 앞에 서서 1코스 완료 도장을 찍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2코스 시작 도장까지 찍고 출발!
### 2코스의 시작, 식산봉
광치기 해변을 지나 유채꽃밭에서 유채와 함께하는 제주를 꼭 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한바탕 사진을 찍고 난 뒤에 식산봉으로 향했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이라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오히려 아무도 없어서 좋았다. 누군가 지나가면 쓸데없이 상상의 나래까지 펼쳐가며 상대방을 의식하게 되는 나로서는 그런 소모적인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서 그런지 마음이 편했다. 버려진 양어장과 늪지대가 있는 내수면을 지나가면서 이 넓은 물밭이 아무것도 안 하고 방치되어 있는 모습이 조금 안타까웠다. 바람이 너무 부는 것만 빼면 참 조용하고 걷기 좋은 길이었다.
내수면을 지나면 식산봉으로 향하는 데크길이 나온다. 사람이 없는 건 어제와 똑같은데 산길이 아닌 데크길이라 발이 편했다. 나는 이곳이 식산봉인 줄 알고 생각보다 쉬워서 좋아했지만 데크와 구불구불한 언덕길 끝에 식산봉 입구가 나타났다. 식산봉은 58.6m로 높은 산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계단이 많다. 가는 길 중간에 전망대가 있길래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성산일출봉을 구경했다. 성산 근처를 걷다 보면 어디에 있든 성산 일출봉이 보여서 나도 모르게 기준점처럼 생각하게 된다. 오늘의 코스는 성산일출봉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가야 끝이 난다.
### 족지물과 동마트
가파르지만 금방 오르내리는 식산봉을 지나 조금만 걸으면 족지물이 나온다. 예전에 몸을 씻거나 채소 같은 것들을 씻을 때 사용했다고 한다. 어찌 보면 대중목욕탕 같은 느낌인데 위는 여자들이 아래는 남자들이 썼다고 하니.. 혼탕이었던 걸까..? 족지물이 있는 오조리를 벗어나 짠내를 한껏 맡으며 놀멍 쉬멍 걸으며 다시 성산 시내로 들어왔다. 제주 동마트 건너편 중간 스탬프 간세를 찾아 도장을 찍고 이곳 이후에는 상점이 없다는 제주 올레의 정보에 맞춰 올레길을 조금 벗어나 점심을 해결했다.
점심은 '지은이네 밥상'이라는 곳에서 먹었는데, 보말 미역국을 시켰지만 갈비찜이 같이 나오는 엄청난 집이었다. 전날 밤에 후기 찾아보면서 안 힘들면 꼭 가서 먹어보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길 잘했다. 맛있고 가격도 저렴해서 배부른 한 끼를 먹었다. 사실 밥도 밥인데 물을 큰 통으로 하나를 다 비웠다. 날이 더워서 땀이 비 오듯 줄줄 흐르면서도 바람막이를 포기하지 못한 게 요인이다. 팔토시를 안 챙겨서 팔이 까맣게 탈까 봐 바람막이를 벗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먼 제주까지 와서 까매질 걱정에 옷 하나 제대로 못 벗은 게 참 웃기다. 나는 굳이 하얘야 할 필요도 없었는데 괜한 고집을 부렸다. 어차피 원래 하얀 편도 아니었으면서 뭘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옷을 입고 있었을까.
### 대수산봉에서 온평포구까지 함께한 고마운 인연들
점심을 맛있게 먹고 대수산봉을 향해 열심히 걸었다. 걷다 보니 아까 오조리를 지나올 때 나보다 먼저 가신 분과 또 마주쳤다! 여성분이셨는데, 감사하게도 먼저 말을 걸어주셔서 거미줄 친 내 입도 몇 마디 말을 꺼낼 수 있게 되었다. 맞지 않는 신발 탓에 발이 아파 천천히 걷느라 속도 차이가 많이 나서 조심히 가시라고 인사드리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됐다.
저물어가는 벚꽃들과 드문드문 피어난 동백을 보며 대수산봉 입구 근처에 도착했다. 정자에서는 백패킹을 하시는 것 같은 차림새의 남자분이 앉아 쉬고 계셨다. 갈길이 멀어 시간이 촉박한 나는 '대수산봉에서 내려오신 분인가 보다'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고도가 높지 않아 만만하게 봤는데 정상까지 쉼 없이 가파른 오르막의 연속이었다. 식산봉은 산책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르는 게 참 힘들었다. 거기에 나무가 빡빡하게 자라서 대낮인데도 해 질 녘처럼 어두웠다. 무서운 마음에 속도를 내어 오르막을 오르다가 힘에 부칠 때 하늘을 봤는데, 저 멀리 나무가 아니라 탁 트인 하늘이 보이는 걸 보고 드디어 정상 근처까지 온 걸 알았다.
힘든 것도 까먹고 뚜벅뚜벅 걸어 오른 정상에서는 성산 일출봉과 섭지코지를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날이 좋아서 먼바다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게 정말 장관이었다. 그리고 정상에는 아까 나를 지나쳐간 여자분도 계셨다! 반가운 마음에 여기서 다시 뵙는다고 운을 띄우며 함께 의자에 앉아 쉬었다. 그분이 건네주신 귤을 까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던 찰나 뒤에서 이상한 기합소리가 났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아까 정자에 앉아 계시던 남자분이었다! 귤을 주신 분이 자연스럽게 남자분께도 말을 걸어주셔서 셋이 쉬면서 한참 대화를 나눴다. 남자분은 예상했던 대로 백패킹을 해보고자 제주에 내려오셨는데 생각보다 가방이 너무 무겁고 확연히 느껴지는 일교차에 밤에는 추워서 못 자고 아침엔 더워서 깼다는 후기를 알려주신 덕분에 백패킹은 준비를 아주 철저히 해야겠다는 교훈도 얻었다.
정상에서 대화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하산길부터 함께 걷기 시작했다. 대수산봉 하산길은 혼자 내려왔으면 약간 무서울법한 길이었는데 다 같이 내려오니 정말 아름다운 숲길이었다. 어제오늘 혼자 걸으면서 내심 외로웠던 건지 낯가리는 나도 말을 생각보다 많이 했다. 이렇게 타지에 와서 처음 만난 사람과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나를 보면서 놀랐다. 나도 이런 거 할 줄 아는 사람이구나. 새로운 사람과 인연 쌓는걸 세상에서 제일 어려워해서 게스트하우스 1인실 잡아두고 라운지에 한 번도 안 나가는 내가 이런 걸 할 수 있었다니, 여행온지 이틀만에 새로운 나를 하나 발견했다.
셋이 함께 10km 정도를 걸으면서 얘기를 참 많이도 했다. 혼인지의 벚꽃을 보며 벚꽃 명소 추천을 받고, 무 밭과 과일 밭을 바라보며 맛집 추천을 받았고, 외진 길을 걸으면서 산티아고에 비해 조금은 부족한 올레길의 현 상황 같은 것들을 얘기했다. 혼자 걸은 시간에 비해 남긴 사진이 없다는 게 흠이지만 대신 길에서 귀한 인연을 둘이나 얻었으니 오늘의 올레길도 대성공이다.
비밀의 화원으로 가는듯한 기분이 드는 좁고 구불거리는 길을 지나 다시 바다를 마주했을 때 우리는 이 짧은 동행의 끝이 왔음을 알아차렸다. 환해장성을 따라 3분 정도 걸으니 스탬프 간세가 나타났다. 각자 도장을 찍고 아쉬운 마음에 자리에 서서 몇 분 수다를 떨다가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문득 '오늘처럼 처음 봤는데도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주는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함께 걸을 수 있는 날이 며칠이나 될까? 참 귀한 시간이었구나.'란 생각을 했다. 제주에 혼자 내려와 조금은 무섭고 외로웠지만 오늘 그 우중충한 기분이 말끔히 해소되었다. 심지어 함께 대화하며 걸은 덕분에 발이 너무 아파서 중간에 포기할까 생각까지 했던 게 상상인가 싶을 정도로 아픈 줄도 모르고 끝까지 걸을 수 있었다.
사람은 원래 혼자 사는 종족이 아닌 것 같다. 혼자 있고 싶어 떠나온 제주였는데, 4월의 어느 날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로부터 함께라는 단어가 주는 행복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게 됐다. 아무리 고립되고 싶어도 외부와 연결된 실 한 줄 정도는 남겨놓아야겠다. 사는 게 지치고 힘들어서 지금처럼 혼자 있고 싶다가도 그게 문득 외로워질 때 다시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