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록 May 13. 2022

제주일기 05 내 발목이 여행의 짐이 되다니

꼬닥꼬닥 혼자 걷는 올레길, 더 걸을 수 있을까?

비상이다. 발에 매일같이 잡히는 물집이 문제가 될 줄 알았건만 우도에서부터 시큰거리던 오른쪽 발목이 발을 디딜 수 없을 정도로 아파오기 시작했다. 발 편하라고 전날 신발을 구매했는데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이 되어버렸다. 방바닥을 걸을 때마다 집에서 신던 쿠션감 좋은 실내화가 걸음수 쌓이는 만큼 자꾸만 그리워졌다.


결국 나는 4코스를 걸으러 가는 대신 정형외과에 가기로 했다. 절뚝이는 다리를 끌고 가려니 800m도 채 되지 않는 거리가 8km처럼 느껴졌다. 애물단지처럼 숙소 장롱에 처박혀있는 등산 스틱이라도 가져올 것을 급하게 나온다고 맨몸으로 나와 아차 싶었다. 오른 다리에 하중이 실리면 찌릿한 느낌이 발목을 타고 무릎과 허리까지 도달했다. 사람도 유인원처럼 신발을 신지 않고 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발볼 때문에 번번이 신발 구매에 실패하는 나는 유인원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발목이 아파 식은땀까지 흘려가며 도착한 정형외과는 서울의 정형외과와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붐볐다. 9시에 진료 시작인 병원에 간신히 9시 반에 도착해서 접수를 하니 1시간 30분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역시 병원은 진료 시작 전에 미리 와서 접수해야 하는 게 정답인 것 같다. 특히나 물리치료가 많은 정형외과는 더더욱! 접수를 마치고 빈자리에 냉큼 가서 앉아 제주 병원의 분위기를 익혔다. 나처럼 여행 중에 다쳐서 오신 분들도 있었지만 확실히 제주도민이 더 많이 계셨다. 여기저기서 제주어로 얘기하는 소리를 들으니 '아, 정말 내가 제주에 와있구나'를 실감했다. 제주에 온 지 5일이나 됐는데 병원에서 제주에 온 걸 실감하다니.. 약간은 억울했다.


진료실 앞 대기 환자 명단에 줄이 그어지는 상황을 기다리고 기다렸다. 혹시나 더 빨리 진료를 받을 수 있을까 싶어 진료실 앞쪽에 앉아 사람들 들어가는 걸 지켜봤지만 접수할 때 안내받은 시간 그대로 한 시간 반을 기다리고 난 뒤에야 의사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발목이 어떻게 아픈지 설명하고 양말을 벗어 육안으로 보니 바깥 복사뼈 아래가 부어서 불룩하게 솟은 것이 보였다. 의사 선생님께서 그 부위를 지그시 눌러보셨는데 내가 엄청 아파하니 엑스레이로 뼈 상황을 보는 게 낫겠다고 하셨다. 진료실에서 나와 절뚝이며 맞은편 방으로 가 엑스레이를 촬영하고 다시 진료실로 돌아와 의사 선생님과 함께 촬영본을 확인했다. 다행히 뼈에 금이 간 것은 아니고 그냥 삔 거라고 하셨지만. 처방해준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으면 부목을 대야 한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 부목을 한채 목발을 짚고 걷는 나를 상상해보니 아주 오싹해졌다. 그냥 걷기도 힘들어서 귀하게 모셔온 카메라도 집에 두고 걷고 있는데, 등산스틱도 짐이 될까 봐 들고 다니지를 않는데 부목이라니! 걷기 여행을 온 나에게 치명타가 될 수 있는 조건이었다. 얼마 전 태백산에 다녀와서는 무릎이 아파서 정형외과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때 관절은 최대한 안 써야 낫는다는 선생님의 말이 기억났다. 부목을 대는 상황만큼은 피해야겠다 싶어 최대한 숙소에만 있겠다는 다짐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 몸이 아프니 마음이라도 달랠 겸 점심 대신 먹을 마들렌과 밀크티를 샀다. 절뚝거리면서도 밥 생각이 나다니. 나는 어쩔 수 없는 먹신인 것 같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마들렌을 먹고 약을 한 봉지 털어 넣었다. 최대한 덜 움직이는 게 회복에 좋을 거란 생각에 침대에서 꼼짝을 안 했다. 서울에서 매일 하던 걸 제주까지 와서 할 줄 누가 알았을까. 저녁 시간에는 100m 거리에 있는 국숫집에서 고기국수를 사 먹었다. 고작 100m를 오는 건데도 다리가 무척이나 아팠다. 허리까지 아플 정도의 통증이었지만 그럼에도 저녁은 맛있었다. 


내가 나를 돌보지 못한 탓에 100m도 걷기가 힘들다. 걸으러 온 여행에 쉼표가 조금 일찍 찍혀버렸다. 물론 내가 계획한 여행도 쉼표가 많은 여행이긴 하지만 조금 일찍 찾아온 쉼표가 반갑지는 않았다. 내 발목이 여행의 짐이 되다니, 여행지에서 자기 관리를 못하면 이렇게 바로 차질이 생긴다는 걸 오늘에야 절실히 느낀다. 항상 멀쩡했다고 오늘도 괜찮을 거란 보장이 없다는 걸 아프기 전에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내가 나를 잘 돌보는 게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제주일기 04 아픔보다 포기가 더 받아들이기 힘든 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