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닥꼬닥 혼자 걷는 올레길 7코스
부모님이 다시 서울로 떠나고 난 뒤 하루를 온전히 쉬면서 근육을 풀어주었다. 이번에 걸어야 하는 곳은 7코스로 시작 지점이 숙소 근처여서 버스를 안타도 된다는 최고의 장점이 있었다. 버스를 타지 않아도 돼서 시간적 여유가 있었지만 걸어야 하는 거리가 17km가 넘는 관계로 조금 서둘러 집을 나섰다. (물론 게으름뱅이의 입장에서 빨리 나온 편. 부지런한 분들이 볼 땐 늦게 나온 편..) 7코스 시작점에는 올레 여행자 센터가 크게 자리하고 있다. 숙소도 예약 가능하고 식당도 있어서 올레길을 다 걷고 난 다음에 인증서를 받으러 올 때 꼭 한번 묵어보겠다는 다짐을 하며 신나게 출발!
걷기 딱 좋은 오전의 날씨. 덥지도 않았고 햇살이 따갑지도 않은 완연한 봄 날씨. 서문로터리를 지나 칠십리 시 공원 길을 걸었다. 공원이 꽤 넓고 길도 잘되어있어서 그런가 걷는 맛이 좋았다. 공원에는 아이들과 산책 나온 가족이나 어린이집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애기들 뛰어노는 걸 보니까 은은하게 웃음이 났다. 세상에 제일 재밌는 게 놀이터인 것처럼 뛰어 노는 아이들을 잠시 보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공원에는 매실나무들이 여러 그루 심어져 있었는데 벌써 매실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지난달에 광양에서 매화 보고 온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대추만한 매실이 주렁주렁이라니, 시간이 참 빨리 간다.
공원을 나와 조금 걷다 보니 어느새 바다가 또 바로 옆이다. 문섬과 범섬이 보이는 탁 트인 바다를 보며 완만한 경사로 되어있는 삼매봉 길을 걸었다. 여름이 오기 전에 미리 풀을 깎고 있는 분들이 계셨는데 매년 하는 선산 벌초 덕분에 풀 튀는 게 얼마나 아픈지 아는 사람인지라 최대한 풀이 닿지 않도록 조심해서 빠르게 통과했다. 완만하긴 해도 오르막으로만 계속 이어진 길이라 조금은 지친다. 거의 힘들어서 못 가겠다 싶을쯤 정상의 정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정자 뒤로는 한라산이 앞으로는 바다가 보여서 경치가 장난 아니었다. 6코스의 제지기 오름보다도 더 좋았다. 올라가는 길에 kbs 수신국(?)이 있었는데 이 송신탑이 내가 숙소에서 계속 보던 놈이라는 걸 단번에 알았다.
삼매봉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은 평지가 아니라 끝없는 계단길이다. 한 번도 안 쉬고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오니 외돌개 주차장이 나왔다. 외돌개 산책길에 있는 황우지 선녀탕이 요즘 꽤 유명한 인생 샷 성지인 것 같았는데, 나는 내려갔다 올라올 엄두가 안 나서 그냥 지나쳤다. 조금 걸으니 동너븐덕이라는 바위 평지가 나타났다. 다들 사진을 찍고 계시길래 나도 삼각대 펼쳐서 사진을 남겼다. 이번 여행에서는 모든 코스마다 최소 한 번 정도는 내 사진을 남기려고 노력했다. 풍경사진을 찍는 것도 좋지만 어쨌든 이곳에 내가 왔다는 사실도 기록되는 게 좋아서. 여러 포즈로 사진을 찍고 100m 정도 걸으니 외돌개가 나왔다.
외돌개는 정말 말 그대로 우뚝 선 외로운 바위였다. 난 뭔가 거창 한 건 줄 알았는데. 오랜 세월 동안 침식돼서 저렇게 됐다고 생각하면 거창하긴 하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수만 년 동안 침식됐을 테니. 크기도 작은 편이 아니라 얼마나 오랫동안 조용히 외돌개가 만들어지고 있었을까. 7코스가 올레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길이라는 글을 어디서 읽었는데 이 외돌개 산책길을 걸으며 만난 올레꾼이 지난 주말에 본 사람보다 더 많았다. 관광하러 오신 분들도 많았지만 올레길 걸으시는 분도 엄청 많이 보였다. 나는 걸음이 느린 탓에 뒤에서 나를 추월해 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걸었다. 내가 좋아하는 속도로 천천히, 한 걸음씩!
산책길을 지나 속골까지는 도로를 걸었다. 9코스를 걷고 가파도에서 숙소로 돌아갈 때 지나쳤던 서귀포여고를 지나쳤다. 야자수가 심어져 있는 고등학교라니, 정말 제주에서만 볼법한 광경이다. 사람은 못 봤지만 학교 자체에서 왠지 풋풋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속골을 지나 야자수 동산을 너머 수봉로를 걸었다. 수봉님이 직접 길을 만들어서 수봉로라던데 도대체 여기 길을 어떻게 만들었나 싶다. 돌길인 건 둘째치고 나름 숲길도 있고 돌도 엄청 많은데 여길 개척하셨다니. 덕분에 정말 좋은 풍광을 보며 걸을 수 있었다. 이런 길을 올레길 아니면 언제 걸어보나 싶을 정도로 멋진 길이었다. 그런데 이런 길에 내 키만 한 가방을 지고 가는 남자분을 봤다. 너무 궁금해서 말 걸어보고 싶었는데 차마 말은 못 걸었음.
열심히 돌길을 지나 도착한 법환포구에서 점심을 과하게 먹고 약간 묵직한 출발을 했다. 좀녀마을 법환 바당올레를 걸을 땐 앞에 경기도에서 오신 관광객분들이 계셨다. 다른 사람들은 다 빠른 걸음으로 지나쳐 가지만 나는 걸음이 느려 추월하기는 힘들어서 그냥 뒤에 따라 걸었는데 뭔가 나도 일행이 된 느낌이었다.
올레길과 도로가 갈라지는 지점에서 관광객 분들도 떠나고 다시 혼자가 됐다. 7코스 중간 스탬프가 있는 곳까지 계속 돌길이 이어졌다. 햇빛이 바다에 부딪혀 부서지는 반짝이는 윤슬을 구경하며 걸으니 바위길도 힘든 줄 모르고 걷게 됐다. 대신 발목이 안 좋으면 발이 고정이 될만한 신발을 신고 와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신발을 좀 크게 신는 편인데 계속 돌 밟을 때마다 발이 안 돌아가게 조심해야 해서 안 그래도 더딘 걸음 더 더디게 걸었다.
도장 찍는 곳이 몇백 미터 남았다는 팻말을 보고 난 이후에 7코스 중간 스탬프가 왜 안 나오나... 할 때쯤 스탬프를 찾았다. 쉼터가 있어서 마실 것좀 사 먹고 갈까 싶었는데 종점 가기 전에 다른 좋은 카페 들어가서 쉬자는 생각으로 지나쳤다. 또다시 끝없는 돌길을 지나 만난 차도가 너무 반가웠다. 잘 닦인 길을 걸으며 발의 피로를 조금 덜었다. 켄싱턴리조트 안으로 걷는 길은 공사 중이라 갈 수 없었던 게 좀 아쉽다. 보통 리조트 안쪽 길이 되게 잘 꾸며져 있어서 다닐 만 한데! (남원 금호리조트나 서귀포 칼호텔 같은)
강정포구까지는 정말 차도 사람도 별로 없는 대로를 걸어야 했다. 주차된 차는 있는데 지나다니는 차가 별로 없고 지나다니는 사람은 더더욱 없어서 유령도시 같았다. 차라리 돌길로 걸으면 경치라도 좋지 않았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강정항을 지나 월평포구까지는 다시 바닷가 바로 옆을 걷는 구간이었다. 근데 신기하게 여기 낚시 포인트가 많은 지역인지 낚시하시는 분들이 엄청 많았다. 그냥 바닷가 같이 생겼는데 사람이 있고, 절벽 같은데 사람이 있고, 저긴 도대체 어떻게 가신 거지 싶은 곳도 사람이 있었다.
월평포구에서 종점 스탬프가 있는 곳까지는 마을을 걷는 길이다. 오후에는 일하는 분들이 계시질 않아서 텅 빈 마을 같아 조금은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줄지어 늘어선 하우스를 보며 완만한 오르막을 걸어 오르는데 오후 볕이 아주 따가웠다. 봄볕에 슬슬 타는 줄도 모르고 걸은 열흘 동안 까무잡잡해져 버린 내 피부가 괜히 신경 쓰인다.
발바닥이 쑤셔올 무렵 종료 스탬프 지점에 도착했다. 발목이 안 아파서 그런지 17.6km를 걸었는데도 지난날 걸었던 어떤 올레길보다 쌩쌩했다. 그럼 발목 안 아팠으면 다른 길들도 이렇게 행복하게 걸을 수 있었을 거란 생각에 갑자기 슬퍼지는 마음. 그리고 7코스가 정말 좋은 게 종료 스탬프 바로 옆이 버스 정류장이라는 점! 숙소 앞까지 오는 버스가 있어서 15분 기다렸다 타고 왔다.
7코스를 걸으면서 놀랐던 점은 생각보다 올레길 걷는 분들이 많다는 점, 그리고 다른 올레길보다도 확실히 인기가 많은 코스라는 점이라는 거였다. 인기가 많은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7코스는 걷는 동안 지루한 줄 모르고 걸었다(강정항을 지날 때는 조금 지루했지만). 숲길과 바닷길이 적절하게 나눠져 있어서 볼거리도 많고 밥집도 꽤 많은 편이라 먹을거리도 많다는 게 이유가 아닐까.
또 7코스를 걷고 나니 올레길에서는 날씨뿐만 아니라 다리 건강이 여행을 크게 좌우한다는 것도 뼈저리게 느꼈다. 이렇게 속도도, 컨디션도 차이가 나는 줄 발목 건강을 잃기 전엔 알 수 없었다. 그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올레길 전체 코스 지도에 내가 걸은 코스를 표시해보니 그래도 서귀포를 거의 다 돌았다. 내일 8코스도 잘 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