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철학의 개념들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는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누구도 우리에게 강제로 일을 시키거나, 어디에 살라고 하거나, 무엇을 먹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진정으로 자유롭습니까?”라고 묻는 다면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제 핸드폰을 손에 들고, 유튜브에서 추천하는 shorts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에는 그저 심심하게 보내던 잠깐의 공백 시간을 이제는 다양한 영상들로 채우게 되었습니다.
내가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콘텐츠가 나를 소비한다는 주장에 크게 공감하게 됩니다.
아도르노는 ‘총체적으로 관리되는 사회’라는 개념으로 현대 사회를 규정했습니다.
그는 현대사회가 분업과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근본적인 자유를 빼앗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찰리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스>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공장이라는 규격화된 공간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부품화 되고, 자유로움을 상실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도르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단순히 육체적으로 억압받는 인간의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근대 이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이 ‘메시지 중심 통치’에서 ‘왕정’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변국들이 모두 왕정을 통해서 일사불란한 군사적 움직임을 보이며 주변국들을 침략하고, 영토를 확장해 가는 모습을 보고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말씀 중심의 국가운영’을 포기하고, 왕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가치를 추구하던 공동체가 힘을 추구하게 되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백성들의 요청에 하나님은 ’ 사울 왕‘을 세워주시면서 ’ 앞으로 왕이 너희들을 약탈할 것이다 ‘라는 경고를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언은 역사적 사실이 됩니다. 즉, 권력이 인간의 ‘몸’을 구속하는 상황은 그 자체가 인간의 역사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다만 현대 이전의 억압과 현대의 억압은 그 방식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 아도르노의 주장입니다.
아도르노의 ‘총체적 관리‘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영화가 <트루먼 쇼>입니다.
트루먼 쇼에는 1차적 억압이 나옵니다. 그것은 주인공 ‘트루먼’에 대한 억압입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스튜디오에서 자랐으며, 그가 성장하는 모습은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생방송됩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은 철저하게 짜인 각본입니다. 그의 절친과 아내조차 배우들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트루먼만 알지 못합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이러한 트루먼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그가 그 사실을 알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영화를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에 나오는 또 다른 중요한 출연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출연자는 바로 ‘대중’ 또는 ‘시청자들’입니다.
영화는 트루먼의 일상과 ‘대중’의 모습을 번갈아 가며 보여줍니다. 바에 있거나, 경비 근무를 서고 있거나, 집에 있거나 모두 TV앞에 앉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트루먼의 굿즈 goods를 구매해서 잔뜩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트루먼의 가짜 삶을 안쓰럽게 생각하며, 어쩌면 트루먼의 인권을 위해서 해당 생방송이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트루먼의 억압을 유지시키는 주체들입니다.
대중은 TV 가 보여주는 허구를 대상으로 자신의 진짜 삶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TV 콘텐츠는 ‘소비 행위‘라는 정점을 향해 기획되어 있습니다.
아도르노의 총체적으로 관리되는 사회는 단순히 육체적 억압을 넘어 정신까지도 통제하는 현대사회의 위협을 말하고 있습니다.
근대 이전에는 지금과 같이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아, 주인 앞에 있는 동안에만 억압을 당했지만, 이제는 미디어를 통해서 정신까지도 통제하는 총체적 관리상태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관리의 최종 목적은 ‘소비에 적합한 인간‘입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현 존 인류의 가정 중요한 체제가 된 지금 가장 중요한 존재는 ’ 소비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총체적으로 관리되는 사회는 ‘소비’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계급을 형성합니다. 더 많이 소비하면 높은 계급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낮은 계급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짜인 그물망 안에서 우리는 나 자신의 존재감과 정체성을 형성하며, 본래의 나와 그 가치를 상실하는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