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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리의 테이블 Feb 27. 2024

훌륭한 인격의 모범

예수께서는 가장 훌륭한 인격을 가지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윤리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한 종교인들에게 비난받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는 마태복음 5장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옳다고 여겨지는 윤리적 행동이 사실은 하나님께 부족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살인하지 말라'는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다'라고 하셨고, '다른 이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는 '마음속에 음욕을 품는 것만으로도 간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종교인들은 훌륭한 인격이란 '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를 가지고 사람의 높고 낮음을 판단하게 되었고, 이것은 하나의 성스러운 욕망이 되어 또 하나의 세속적인 피라미드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는 일반적인 윤리교육이 추구하는 바입니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이러한 모델도 유용한 면이 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무언가를 욕망하는데, 좋은 행위가 욕망의 모델이 되면 사회에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구조입니다. 한 사회의 구조가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어떠한가에 따라 윤리적 모델이 그들에게는 멍에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영화 '기생충'에 유명한 대사 중 하나가 '돈이 다리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돈이 많으면 구겨진 성격도 펴지고, 험악한 인상도 펴진다는 의미로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이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고, 태도도 바른 반면 그렇지 못한 집 아이들은 성격도 거칠고, 공부도 못하고, 태도도 거슬린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제 경험으로는 이것이 참 맞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대안학교 교사로서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 아이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보육원이나 어려운 가정의 아이들도 만납니다. 학교의 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결핍이 적고, 바른 모델을 보고 자랐기에 성품이 좋고, 태도가 반듯합니다. 물론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그렇습니다. 반면, 환경이 어려운 아이들은 결핍을 채우려는 행동과 적대적인 마음 때문에 뭔가 거슬리는 행동이 있습니다. 이것도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그러한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 사회 속에서 단순히 윤리적 성취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모델은 누군가에게는 정당할지 모르지만, 누군가에게는 멍에가 됩니다. 


예수께서는 '바르게 사는 것'을 넘어 '사랑하라'라고 말하셨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행동으로 서로를 평가하는 것을 넘어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를 살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의 시대에도 동일했습니다. 당시 종교인들은 더 훌륭한 '행동'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연구하며 그것을 성취해 나가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고, 다른 이들도 이 욕망의 모델을 좇아 자신을 평가했습니다. 


그들이 제시한 '올바름'에 도달하는 사람들은 '훌륭함'이라는 훈장을 달아주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죄인'이라는 훈장을 달아 주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훌륭함'의 훈장을 단 자들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셨고, '죄인'의 훈장을 단 자들을 '친구'라 부르셨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사랑'이지 누군가를 평가해서 떨어트리거나 더 윤리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윤리적 모델은 '그 마음에 사랑'이 있는가입니다. 

어떠한 윤리적 행동을 해도 그 마음에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처럼 시끄럽고 거슬리는 행동입니다.  

반면 사람이 실수를 좀 해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고 또한 다른 이의 실수를 너그럽게 포용하는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눈에 타인을 향한 사랑이 있고, 아픔에 대한 동정이 있고, 공감이 있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입니다. 

마음속에 사랑도 없고, 훌륭한 행위도 없는 사람, 훌륭한 행위는 있지만, 마음속에 사랑이 없는 사람을 넘어 마음속에 사랑이 있는 사람으로, 타인을 향한 지향이 있는 사람으로 다음세대를 키워야 우리 사회가 소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준 것 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더 나은 윤리적 존재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주는 '사랑'의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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