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어머니는 근대적 교육을 받지 않으신 분입니다. 충청도 시골, 12남매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공부의 기회를 얻지 못하셨습니다. 어머니는 27에 결혼을 하셨고, 결혼하신 이후에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셨는데, 글을 편하게 읽을 줄 모르셨기 때문에 주관적인 체험과 경험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가시고, 표현하셨습니다.
반면 저는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의 근대적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머니의 초월적이고, 체험적인 신앙보다는 개념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알아갔습니다.
저에게 있는 궁금증은 이것이었습니다.
"나에게는 어머니에게 나타나는 신비로운 기적들이 왜 일어나지 않을까?"
저의 어머니는 기도도 많이 하셨고, 소위 '입신'이라는 신적 체험도 많으셨습니다. 가끔은 가까운 미래에 대한 일들을 아는 경우도 계셨으며,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도 아시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저는 은근히 이런 어머니의 경험들이 부러웠습니다. 특별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을 하는 어머니는 하나님에게 특별한 취급을 받는 사람이고,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하는 나는 그러지 못한 평범한 존재로 느껴졌습니다.
한때는 어머니와 같은 특별한 경험을 갖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며 매달리기도 했지만, 그럴 수록 신비로운 경험을 하기보다는 정신만 점점 또렸해졌습니다. 이런 시간이 오래되면서 저는 초월적인 현상에 대한 회의와 반감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초월적인 경험들을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시각에서 재해석을 했습니다.
핵심 단어는 '우연', '주관', '정신 이상'입니다.
어머니가 가까운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시고, 그것이 현실화되면 '우연'이라는 단어로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우연히 그런 것입니다.
기도 중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면 그것은 '주관'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가끔 어떤 집회 같은 데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는 일들이 있는데, 이런 경우는 당사자가 '귀신 들린'것이 아니라 '정신병'에 걸린 것입니다.
가까운 예로, 저희 아버지는 파킨슨을 7년 앓으시다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얼마 전부터 '섬망(delirium))'증상이 있으셨습니다. '섬망'은 인지 장애의 일종으로 여러 증상 중 '헛 것'을 보는 증상이 있습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던 가을 가족이 함께 마루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아버지는 갑자기 누군가 집에 침입을 했다며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흥분이 시작되면 집 안에 있는 온갖 무기들을 들고 외부 침입자와 싸우려고 하시고, 결국 본인이 다치고, 위험에 빠지는 일이 매일매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외부 침입자와 싸우기 위해서 집 안 곳곳에 낫, 쇠 몽둥이, 막대기 등을 숨겨 놓으셨습니다.
섬망을 앓으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흡사 '귀신이 들린 것'처럼 행동하기도 했기 때문에 저는 귀신을 쫓아내는 현상들도 결국은 '정신 질환'의 일종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초현실적 현상에 대한 저의 판단이 아주 틀리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아버지의 섬망은 분명히 정신 질환의 문제였습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분명 '존재'하는 것들이었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우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님의 모든 예언이 다 실현된 것이 아니며, 유독 맞아떨어진 것에 대해서만 주변 사람들이 기억하기 때문에 어머님이 미래를 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머님이 정말 미래를 보셨다면, 우리 가족을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하게 만든 아버지의 사업은 실현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현상이 우연, 주관, 정신 이상은 아니고, 그것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현상도 분명히 있습니다.
심리학자인 '김진'박사나'오은영'박사도 심리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초월적인 영역'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 영역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해석이 안 되는 영역입니다.
성경 신약의 사복음서에는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일들이 나옵니다.
어떤 부분은 예수께서 정신 병자를 고치시는 내용도 있고, 다른 부분은 정말로 귀신을 쫓아내는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대 사람들 입장에서는 어떤 사람이 정신 이상자인지, 귀신에 들린 것인지를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정신분석학 또는 심리학적인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구분해서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평균에서 벗어나는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귀신에 들린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고, 그러한 병자를 고치는 예수의 행위를 '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경우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명백히 귀신을 쫓아내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런 장면은 그저 어떤 사람의 정신을 치유하는 장면과 아주 다릅니다.
마가복음 5장에 예수는 무덤들 사이에 사는 한 남자를 만납니다. 예수는 그 남자의 안에 살고 있는 귀신과 대화를 나누고, 그 귀신에게 명령하여 근처에 있는 돼지 떼에 들어가도록 명합니다. 이 장면은 명백히 존재하는 귀신 또는 마귀를 인지하고, 그를 공간적으로 이동시키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저는 여전히 어떤 경우가 정신병이고, 어떤 경우가 귀신에 들린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물론 짐작을 할 수 있겠지만, 확실히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저에게는 없습니다.
다만, 성경에 등장하는 귀신들리거나 정신병을 앓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이거나, 인생에서 극심한 고통을 당했던 사람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는 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은 이스라엘 땅에 사는 이방 과부의 딸입니다. 당시 과부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였습니다. 무덤에서 사는 남자 역시 거라사라는 이방 땅에 살았으며, 근처에 돼지라는 '부정한 짐승'이 있었음을 감안하면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의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귀신 들리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소외계층이며, 그들의 귀신 들림이 '삶의 스트레스'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소위 '신내림'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인생의 극심한 고통을 겪은 후에 신내림을 받게 됩니다. 신내림을 받은 모 연예인 역시 두 자녀를 잃은 슬픔 가운데서 신내림을 받게 됩니다.
삶의 고통과 정신병, 귀신 들림의 확정할 수 없는 어떤 연결 고리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합리적으로 추론을 해보면, 극심한 스트레스가 정신병을 일으키고, 방치된 정신병이 마음에 병이 되어 그 어둠 속에 귀신이 들어앉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는 12제자를 선택한 후 몇 가지 명령을 해서 마을로 보냅니다. 그중에는 다음과 같은 명령이 있습니다.
'Kick out the Demon' 악령을 쫓으라
이 명령이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분들에게는 실질적인 '귀신을 쫓으라'는 명령으로 다가오겠지만, 그러한 능력이 없는 저와 같이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어떤 명령일까요? 저희는 12제자들처럼 그런 신비로운 능력이 없는 듯 하니 말입니다.
저에게는 모든 인간의 마음을 좀 먹는 것들이 '귀신'으로 여겨집니다.
미움, 다툼, 시기, 질투, 열등감, 불안, 분노, 절망과 같은 것입니다.
다만, 단순한 감정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절망'은 정신에 타격을 주지만, '슬픔'은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부모를 잃은 자녀의 마음에 슬픔은 건강한 감정이지만, "그래서 나는 살 이유가 없다"라는 생각은 '절망'을 낳고, 마음에 어두움을 드립니다.
교사로서 평범한 능력만을 가진 저는 아이들의 마음속에 들이우는 어둠과 싸우고자 합니다.
절망을 쫓아내고, 미움을 쫓아내고, 시기와 질투를 쫓아내고, 불안과 분노를 쫓아내려고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아이들의 마음에 병으로 남게 되고, 자라면 잘못된 생각을 심어주어, 아름다운 세상을 왜곡되이 보게 됩니다. 예수께서 '귀신을 쫓으라'라는 명령은 첫 번째는 실존하는 귀신을 쫓으라는 명령이고, 두 번째는 귀신을 부르는 마음의 질병을 쫓으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