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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리의 테이블 Jun 07. 2021

진리는 무엇인가?

영화 매트릭스로 바라보는 인식론_영화철학

왜 매트릭스 감독은 what is truth를 말하는가? 


인식론 대전환의 역사

감각의 세계는 그림자일 뿐이다

고대 그리스의 주요 철학자들은 감각은 세계를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오감을 통해서 파악되는 세계는 그저 그림자를 보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세계(진리)는 어떻게 볼 수 있는 것일까요? 진짜 세계를 보려면 이성을 사용해야 합니다. 오감을 통해서 포착된 세계를 진술하는 것을 넘어, 그 세계를 포괄할 수 있는 개념의 세계를 보아야 진짜 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진중권 교수는 미학오딧세이에서 ‘가상이 현실을 대체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과연 감각의 세계가 현실인지, 관념의 세계가 현실인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오직 신의 은총으로만 볼 수 있다

중세의 전통은 인간의 인식에 은총의 빛이 밝혀져야 진짜 세계를 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진리의 세계를 알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요한복음 4:24에 보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육체성이 없으십니다. 딱 한번 그분이 육체를 입으신 사건이 있는데,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육체성이 없다는 것은 감각인식을 통해서 지각이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만물의 근원이신 분을 인지할 수 없는 감각으로 포착하는 세계가 본질적 세계일 수 있는가에 대해서 회의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의 인식전통을 옳은 것으로 여기고, 초기 기독교의 신학을 정초하였습니다. 

우리가 실재의 세계를 보는 것은 내적감성을 통해서, 영혼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우리에게 나타내실때 가능합니다. 


중세적 인식론의 붕괴

고대에는 자연세계를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체로 인식했습니다. 모든 자연물은 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 목적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의 배후에는 하나의 법칙이 존재하고, 인간도 그 법칙을 따라 사는 삶이 옳은 삶이라고 여겼죠. 중세에 이르러서는 그 법칙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만물이 운행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지금의 기독교 세계관의 기초입니다. 물론 자연을 하나의 커다란 유기체로 보느냐에 대한 시각은 다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르네상스를 거치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이러한 중세적 세계관이 도전을 받게 됩니다. 사실 중세세계관의 근간이 ‘하나의 법칙’에 대한 도전이라기 보다는 당시 ‘교회(로마카토릭)’가 성경을 바탕으로 내놓은 구체적인 과학적 견해와 교회의 권위가 도전을 받은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견해가 동일하기를 원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은 것입니다. 르네상스와 과학의 발전이 당시 교회의 권위를 흔들고, 1633년 갈릴레이 재판과 같은 사건들이 일어나며 기존의 세계관이 붕괴되는 위기를 맞게 됩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나선 종교재판정의 풍경.

진리는 숫자이다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는 혼란의 상황속에서 데카르트는 ‘명확한 진리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는 1637년에 방법서설을 써서, 명확한 인식은 수리자연과학적 인식임을 주장했습니다. 수학적으로 환원된 인식만이 확실한 인식이라는 것입니다. 즉, 수학적 방식이 이성적 방식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때부터 자연을 수학의 틀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별의 위치를 수학으로 표현하고, 사물의 크기와 모양을 수학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제는 색깔도 수학적으로 표시가 가능합니다. 수리자연과학적 정신은 수학으로 표현된 것만이 확실한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영화 매트릭스는 수학적 언어의 사용이 극대화된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계 전체를 수학적(코딩)으로 지은 것입니다. 인간은 수학을 이용해서 기계를 만들고, 기계언어를 만들어 기계에게 명령을 내리다가 결국 기계가 인간을 수학을 통해서 통제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수리자연과학의 눈으로 자연을 바라보게 되면서 인간은 자연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과거 자연재해를 신의 분노나 인간의 죄로 해석했던 사람들은 이제 인과적 설명을 진리로 여겼습니다. 더불어 자연에 대한 신비나 숭배적 태도도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자연은 이제 인간 앞에 놓인 자원입니다. 인간이 파악하여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로 전환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연을 하나의 생명에서 에너지로 생각하게된 인식론적 전환은 거대한 것이었습니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은 곧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인간을 신의 창조물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하나의 에너지, 고도화된 물질로 바라보는 관점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데카르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하며 이성중심의 시대를 얼었음. 

존재물음과 현대 기술문명 

수리자연과학적 진리를 신봉하던 근대는 커다란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사전 징후는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이었고, 이러한 흐름이 세계1, 2차 세계대전을 맞이하면서 커다란 굴곡을 이루게 됩니다. 근대정신이 과연 인류에게 남겨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반성이 여기 저기서 일어나게 됩니다. 

20세기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이라는 책에서 ‘존재와 존재자’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존재는 존재자를 앞서는 어떤 것이며, 근대 자연수리학의 포착 대상은 존재가 아닌 존재라입니다. 

현대 기술문명은 자연수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과학을 통해서 건설된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존재하는 것들을 계산가능한 것으로 환원하여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 그것을 수치적으로 계산해 내는 것은 대상을 파악하려는 시도입니다. ‘대상화’한다고 합니다. 내가 있고, 내 앞에 있는 어떤 것과 거리를 유지한채 그것을 나의 이성으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것의 외형을 분석하고, 수치로 또는 데이터로 정리하여 그것을 파악합니다. 

왜 파악하려고 합니까? 그것은 대상을 소유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대상을 만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대상과 거리를 두고 그것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것 앞에서 나를 열어 만나는 것입니다. 

전자를 분석적 방법이라고 한다면, 분석적 방법은 대상과 관계 맺음이 아니며, 그것을 나의 기준으로 분해하여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러한 방식에 어울리는 사물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분석적 방식이 생명에게 마저 적용된다면 어떻습니까? 

사람을 데이터로만 파악하려 한다면 어떻습니까? 데이터로 파악한 사람은 온전한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데이터를 넘어서는 ‘존재’를 갖고 있습니다. 

현대 기술문명은 수치로 파악한 것만이 본질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수치로 계산가능한 인간의 요소는 극히 일부이며 본질도 아닙니다. 인간의 존재, 그 자체는 신비한 것이며, 수치로는 포착불가한 것입니다. 

영화에서 매트릭스는 스스로 존재한 것이 아닙니다. 매트릭스는 인간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인간이 대상을 분석하여 파악하고, 그것을 지배하려는 속성으로 부터 매트릭스가 탄생했습니다.분석하여 소유하여 사용하려는 욕망을 가진 매트릭스는 인간을 분석하여 파악하고 그것을 건전지로 활용합니다. 마치 우리가 자연을 그렇게 대하는 것 처럼 말이죠. 닭 수만마리를 좁은 공간에 가두고 키우거나, 살아 있는 곰의 쓸개에 주사바늘을 찔러 빼먹는 행위들 말입니다. 매트릭스는 인간의 지배욕구와 폭력성이 나은 산물입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조작된 세계에 대해 왜 의심하지 않는가

매트릭스는 귄터안더스가 현대 기술문명을 비판하면서 편집가능한 세계, 조작이 용이한 세계를 빗대어 말합니다. 영화 매트릭스도 조작된 세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매트릭스에 의한 조작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인간의 감각을 통해 들어가는 신호를 조작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신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을 현실화 시킵니다. 왜 사람들은 조작된 세계에 의심하지 않을까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자신에게 제시되는 세계 속에서 욕구가 만족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연하기 때문에 반성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은 상상속에서만 벌어지는 일인가요? 조작은 단순히 감각기관의 왜곡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알고리즘에 갇히다 

현대 사회가 기술문명 위에 세워지면서 우리는 점점 더 조작가능한 세계 속에 빠져 들고 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양극단의 대립이 더욱 거세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의 배후에 다양하고 복잡한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그 원인 중 하나가 ‘유투브 알고리즘’과 ‘종편채널’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유투브 알고리즘은 하나의 검색어를 통해서 콘텐츠를 소비하면 그것과 비슷한 동영상을 추천합니다. 내가 애초에 어떠한 성향을 가지고 콘텐츠를 검색했다면 그 이후 그와 동일한 성향의 영상을 지속적으로 추천합니다. 동일한 성향의 영상을 여러편 접한 사람은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이 사실이라고 믿게 됩니다. 종편 채널도 마찬가지입니다. TV조선은 TV조선의 색깔을, JTBC는 JTBC의 색깔에 맞는 방송을 합니다. 결국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해주는 채널을 선호하며 고정 시청자가 되고 확증편향적 태도를 갖게 됩니다. 확증편향이란, 자신의 생각을 확증해주는 정보만을 취사선택하여 자신의 견해를 더욱 공고히 해나가는 것입니다. 좋은 사고란, 열리면서 확증되는 것이지만, 확증편향은 좁히면서 확증합니다.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태초에 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윤리적 타락으로 생각하지만, 저는 오히려 인식론적 타락이 더 본질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식론적으로 선과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져버린 인간이 마치 선과악을 구분할 수 있는 것 처럼 자신을 인식하며 온갖 비극을 겪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보여주는 것은 인간의 인식능력이 조작가능하며 취약하다는 것입니다. 

18세기 독일 철학자 칸트도 인간의 인식능력이 자연수리학적 범주 내에서는 명확함이 가능하지만, 그 범주를 넘어서는 초월적 영역에서는 지식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실재와 만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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