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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리의 테이블 Sep 28. 2021

양심이라는 것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요?

국가 제 2권, 아무도 보지 않아도 '정의'를 행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그 무엇. 1)  

<죄와 벌>은 러시아의 대 문호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가 1867년에 출간한 소설입니다. 

죄와벌 / 도스도예프스키 표지

법학을 전공하는 대학생 라스꼴리니코프는 나퐁레옹 3세의 '초인' 사상에 빠져 있었습니다. 

나퐁레옹 3세의 초인사상에 의하면 "인류는 초인과 범인으로 나뉘어진다. 초인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모든 사람을 좌지우지할 수 있고 인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합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찌는 듯한 여름 답답한 방에 있고 가난 때문에 가족이 해체될 상황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는 돈이 부족했습니다. 돈의 부족은 그와 그의 가족에게 자유를 박탈했습니다. 

그의 여동생은 돈 때문에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해야 했고,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어머니도 그것을 묵인했습니다. 여동생의 희생으로 얻은 돈을 가지고 공부를 해야만 하는 라스클리니코프 자신의 상황이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그는 이 모든 불평등과 구속의 원인이 돈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개인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860년대 러시아 신문에 난 사회문제의 대부분은 도시빈민, 알콜 중독, 매춘과 대기오염이었습니다. 그는 사회적 불평등과 불행 또한 돈(불평등)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불평등한 사회와 그 원인을 제거해야 하며, 그 원인은 돈을 가진 악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초인은 선악을 초월하고 스스로 법률이 되어 비범하고 강력하며, 다수의 인간은 인습적 도덕에 얽매이는 약하고 평번하다"고 했습니다. 초인 사상은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있어서 심리적인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지만 초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나는 초인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되지 않는가?" 

여기서 모든 것이라는 것은 살인까지도 포함합니다. 

초인이란, 신이된 인간을 의미합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이 '초인'에 속해있으며 자신이 자유함을 입증하기 위해 무자비한 고리대급업자인 전당포 노파를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전당포 노파를 죽여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려고 한 것이며, 법과 윤리라고 하는 것은 넘어서야할 대상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출처: 석영중 교수 강의

라스콜리니코프는 결국 전당포 노파를 살해합니다. 

하지만, 우발적으로 전당포 노파의 여동생까지 살해하게 됩니다. 자신의 자유와 사회적 정의를 위한 살인을 저지른 라스콜리니코프! 

하지만 그는 살해직 후 자신이 자유도 정의도 이루지 못한 상태에 빠져버렸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는 세 가지 내적 감정을 경험합니다. 


첫 번째, 살인 직후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느낍니다. 자신에 대한 혐오감은 어머니에 대한 혐오감으로 여동생에 대한 혐오감으로 번져갑니다. 결국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혐오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두 번째, 부자유함을 느낍니다. 심리적인 자유를 위해서 "나는 초인이다. 모든 경계를 넘어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서 살인을 저질렀지만 이상하게 부자유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부자유해서 견딜 수 없었고, 오히려 이 부자유가 빨리 끝났으면 하고 바랬습니다. 


세 번째, 그는 살인을 저지른 후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느낌을 지울수 없었습니다. 

마치 무언가가 내 안에서 도려내어진 것 처럼 고립되었다고 느꼈습니다. 내가 도려내어져서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졌다는 그 느낌이 라스콜리니코프를 미치도록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살인을 저지름으로써 인간의 내면에 있는 어떤 것이 상실되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작품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지옥이란 무엇인가? 지옥이란 어떤 공간이 아니다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다. 지옥이란 사랑할 수 없는 상태다." 


라스꼴리니코프는 법 또는 양심이 그저 나의 자유를 구속하는 거추장스러운 무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넘어서면 오히려 자유로울거라는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오히려 더 깊은 구속상태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그 무언가의 힘과 목소리로 인해 자기 자신을 혐오하게 되었으며, 어두운 단절의 방으로 내버려졌습니다. 

법과 양심은 외부로 부터 부여된 것이 아닌, 인간의 내면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내면의 양심

영화 <플라이트>는 거짓말과 방탕한 삶이 일상화된 한 비행기 조정사의 양심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주인공 휘태커(덴젤 워싱턴 분)는 비행기 조정사입니다. 비행기 조정사로서 누구보다도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는 그였지만, 사생활은 그와는 정반대였습니다. 알콜 중독, 마약, 우울증을 겪고 있는 그는 비행중에도 술을 먹는 상황까지 이르렀습니다. 오렌지 주스에 술을 타서 조정석에 앉았습니다. 조정은 부기장에게 맡기고 수면대를 하고는 깊은 잠에 빠져듭니다. 평소와 같다면, 착륙하기 직전에 일어나 조정석을 잡고 활주로에 내리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하지만 그날 기체 결함으로 비행기가 곤두박질 하고 있는 상황에서 눈을 떴습니다. 아직도 술기운이 남아있는 상황이었지만, 탁월한 판단력과 비행실력으로 위기를 벗어납니다. 비행기에 있는 모든 사람이 사망을 해도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4명의 사망자만 남긴채 그야말로 영웅처럼 모두를 구했습니다. 언론은 일제히 휘태커의 영웅담을 보도했습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기지를 발휘해 생명을 구한 그를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사고의 경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의 음주 비행에 관한 증거가 드러날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업무적 과실을 덮기 위해 동료들에게 거짓말을 부탁하고, 법정에서도 거짓 증언을 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더는 넘어설 수 없는 한계를 경험하고, 모든 진실을 털어놓습니다. 

그 내면에 존재하는 무언가의 힘에 이끌려서 말이죠. 

https://www.youtube.com/watch?v=w-8JZnk8g40

위대한 사상가이자, 소설가인 C.S. Lewis 는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에서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무언가를 '자연법'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이 이 법칙을 '자연법'이라고 부른 것은, 굳이 따로 배우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을 모르는 이상한 사람을 전혀 만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색맹이나 음치가 가끔 있을 수 있듯이 이 법칙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 전체를 놓고 볼 때, 인간이라면 누구나 바른 행동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가지고 있게 마련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 생각이 옳다고 믿습니다. 만약 그 생각이 옳지 않다면 우리가 이 전쟁에 대해 언급해 온 말들은 전부 헛소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나치도 우리처럼 내심으로는 무엇이 옳은지 알고 있으며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면, 아무리 그들에게 '너희는 그르다'고 말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옳다고 말하는 개념이 그들에게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들과 싸울 수는 있어도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머리카락 색깔을 두고 비난할 수는 없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각 문명과 시대의 도덕간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전적인 차이라고 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양심은 약자의 계략일 뿐이다

인간의 내면에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신비한 양심이 선천적으로 있다는 앞선 주장과는 반대로 양심은 교육과 경험의 결과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독일의 위대한 소설가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은 싱클레어라는 주인공의 성장을 그리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bZjg3HCq-A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싱클레어에게 어느 날 데미안이라는 친구가 다가옵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보다 나이도 많고, 지식적으로도 풍부했으며, 뭔가 자신만의 확실한 세계를 가지고 있는 듯 했습니다. 특별히 성경 시간에 전통적인 견해에 이견을 제시하고, 독창적인 눈으로 성경을 해석했습니다. 


창세기에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십니다(합리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에 격분한 가인은 아벨을 들판으로 유인하여 돌로 쳐서 죽입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입니다. 이를 본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 아우가 어디 있는냐? 네 아우의 피소리를 내가 들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가인을 보호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가인은 다른 이들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이마에 표를 찍어주셨고, 이 표로 인하여 다른 이들이 가인을 죽이지 못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경 구절에 대해서 데미안은 새로운 해석을 내 놓습니다. 


"아주 간단해! 맨 처음에 존재하며 이야기를 이끌어낸 것, 그건 표적이야.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얼굴에 다른 사람들을 겁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어. 사람들은 감히 그를 건드리지 못했어. 그가 그들을 압도했던 거야, 그와 그의 자손들이. 어쩌면, 아니면 분명히, 그것은 편지에 찍히는 소인처럼 정말로 이마에 찍힌 표적은 아니었을 거야. 사람 사는 데 그렇게 단순한 일은 드물어. 오히려 그건 뭔가 거의 알아볼 수 없는 무시무시한 그 무엇이었을 거야. 그것은 오히려 시선에 담긴 비범한 정신과 담력이었을 거야. 그 남자에게는 힘이 있었고 사람들은 그를 겁냈어. 그는 <표적> 하나를 가지고 있었어. 그걸 사람들은 자기 원하는 대로 설명할 수 있었어. 그리고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들한테 편하고 자기들이 옳다고 하는 것을 원하지. 사람들은 카인의 자손들이 무서웠어. 그들은 <표적> 하나를 가지고 있었거든.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 표적을, 그것의 원래 모습인 우월함에 대한 표창으로 설명하지 않고, 반대로 설명한 거야. 사람들은 말했지, 이 표적을 가진 녀석들은 무시무시하다고, 또 그들이 실제로 그렇기도 했어. 용기와 나름의 개성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한테 늘 몹시 무시무시하거든. 겁없고 무시무시한 족속 하나가 돌아다닌다는 것은 몹시 불편한 일이었지. 그래서 이제 이 족속에게 별명 하나와 우화 하나를 덧붙여놓은 거야. 복수 하려고, 견뎌낸 무서움을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약간 해롭지 않게 억제해 두기 위해서. 이해되니?...내 생각은, 카인은 늠름한 젊은이었는데 그저 사람들이 그저 사람들이 그를 무서워했기 때문에 그에게 이 이야기를 매달아놓은 거라는 거지. 이야기는 그냥 하나의 소문이었어...그러니까 어떤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 하나를 때려죽인 거야. 어쩌면 그건 영웅적 행위였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아닐 수도 있지. 어쨓든 다른 약한 사람들이 이제 잔뜩 겁이 난 거야. 그들은 몹시 탄식을 했지." 

가인과 아벨

데미안은 전통적인 성경의 해석을 비판하며 새로운 해석을 내놓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사실은 특별한 표식을 가진 강한 사내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표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신화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신화가 바로 창세기에 나오는 '형이 동생을 죽인 사건'인 것이죠. 어느 누구도 그 강한 사내를 이길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사내가 그토록 강한 이유를 '신'께서 그렇게 해주었다는 식으로 자신들의 궁금증을 해결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 대해서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을 수 있지만, 오늘 나누고자 하는 주제에 촛점을 맞추어 이야기하자면, 성경에서 가인의 표식은 '죄를 지은 자'의 표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인의 표식'인 것이죠. 하지만 데미안은 가인의 표식이 '승자의 표식'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는 승자의 표식인데, 약한자들이 자신의 약함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승자의 표식을 죄인의 표식으로 치환했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이야기를 진전 시키면, 폭력이 나쁜 것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라 폭력을 당하는 약자들이 그것을 나쁜 것으로 판단하는 윤리체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

프리드리히 니체라는 독일의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그의 책 <도덕의 계보>에서 도덕의 기원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그는 삶을 개척하고, 장애를 극복해내는 강한 자만이 위대한 인간이며, 전통과 윤리에 종속되어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는 인간을 열등한 존재로 보았습니다. 이기고, 쟁취하고, 생존하고, 번영하는 인간이야말로 인류적 생존의 이상적 인간상입니다. 그는 기독교적 사랑과 평등의 윤리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기독교적 윤리는 약한 존재들이 만들어 낸 것으로 인류를 후퇴시키고, 열등하게 만드는 패자의 윤리라고 합니다. 


결국 윤리, 양심은 학습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다수의 열등한 자들이 소수의 강한자를 통제하기 위해 만든 학습된 정신의 일부일 뿐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 안에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학습된 것입니다. 양심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며, 권력을 가진 자들에 의해서 조작될 수 있습니다. "옳다. 그르다"의 판단 기준은 권력을 가진 자에 의해서 세워진 것일 뿐입니다. 


영화 트루먼쇼는 이렇게 조작된 세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hLZCH2uxi8

영화 트루먼 쇼

트루먼을 둘러싼 조작된 세계에서는 그 세계만의 윤리가 존재합니다.일상을 벗어나는 일을 해서는 안되며, 바다를 건너서도 안됩니다. 어릴때부터 조작된 세계에서 자란 트루먼은 기획자에 의해서 주입된 윤리를 받아들입니다. 


앞서 윤리와 양심이 인간의 선천성에 기반한다는 생각과는 다르게 윤리와 양심은 후천적이며 조작된 것이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To be continued



1) 서울대학교 석영중 교수 <죄와 벌> 강의를 중심으로. 

이전 14화 인간의 도덕성은 얼마의 돈 앞에서 무너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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