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트를 따르지 말고, 질문을 따르라.
지난 학기 교사 연구 모임에서 '고전 독서 교육'에 대해서 연구를 했습니다.
몇 해전 철학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중 '영원에 대하여' 부분을 읽어주며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에 대해서 교사인 내가 설명하는 것보다, 고전을 직접 읽어주니 수백 년의 지혜가 학생들에게 직접 전달되는 듯했습니다. 그때부터 고전 읽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에게 고전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은 생겼는데, 문제는 나 조차도 읽은 고전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음먹고 차근차근 고전을 읽기로 했습니다.
서양 고전 <길가메시 서사시>로부터 <그리스 비극>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읽어 나갔습니다.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플라톤 <국가>,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경우 꼬박 5일이 걸렸습니다. 10여 권을 읽어 나간 시점에서 방학이 끝나고 학기가 시작되면서 읽는 속도가 현저히 떨어지게 됐습니다.
인문고전 리스트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 St. Jones College의 리스트를 사용하였는데, 100권짜리 리스트였습니다. 세인트 존스 칼리지의 경우 매년 25권의 책을 읽고 토론을 한다고 하는데, 아마도 발췌독을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세인트 존스 칼리지 리스트에 '순수 이성 비판' 같은 철학책이 있는데, 이 책을 비전공자가 읽어서 이해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인문고전 읽기의 중요성을 주장한 한 작가는 고전 읽기가 아이를 천재로 만든다고 주장했습니다.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말 고전만 읽으면 천재가 되는지 의심이 듭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학생들을 지도해보면 고전을 읽어낼 수 있는 수가 적고, 고전을 읽어낼 수 있는 학생은 대체적으로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고전을 읽어서 천재가 된 것인지, 천재가 고전을 읽을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누구나 고전을 읽고 천재가 된다면 최소한 어느 곳에서는 천재가 넘쳐난다는 소문이 들려와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고전이 지적 성장에 확실한 도움을 주지만, 그냥 읽으면 된다는 식의 주장은 저로서는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고전 독서 연구를 하면서 여러 가지 자료를 살펴보았는데, 가장 일반적인 주장이 '고전을 읽으면 똑똑해진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재일 작가의 글을 보았는데, 그의 주장이 오랫동안 여운이 남았습니다. 자이니치 저술가이자 리츠메이칸 대학교의 교수 서경식은 '고전이 무엇입니까?'라는 주장으로 자신의 고전에 대한 생각을 피력했습니다. 본인 스스로도 어떤 고전은 너무 어렵고, 재미가 없어서 읽지 못했고, 나중에 다시 도전했지만, 결국 포기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고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삶의 위기를 만났을 때 지혜를 줄 수 있는 책이라면 고전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고전을 Classic이라고 하죠?
고전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영어 Classic은 라틴어 ‘클라시쿠스(classicus)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클라시쿠스'는 사실 ‘함대'라는 의미를 가진 ‘클라시스(classis)’라는 명사에서 파생된 형용사입니다. 이는 로마시대에 국가가 위기 상황에 처해있을 때, 국가를 위해 군함을 여러 대 기부할 수 있는 부를 가진 사람을 일컫는 말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즉 고전이라는 말 자체가 '위기에 처한 누군가를 구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면, 모든 고전이 다 고전이 아니라 '내 삶에 길을 열어주는 책'을 고전이라고 부를 수 있고, 이렇게 이해를 하고 나니 뭔가 가닥이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천재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삶에 있는 질문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한 세미나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무기력해지는 이유는 질문을 던져도 해답을 얻지 못할 때입니다."
이 말을 듣고 얼마나 공감이 됐는지 모릅니다. 저 역시 인생의 중요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 헤매다 무기력에 빠진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고등학교에는 흔하지 않은 철학교사로서 '왜 철학을 배워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단 하나의 대답만 해야 한다면, 스스로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아마 고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일반적으로 '고전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는 고전들은 이미 검증이 끝난 책들입니다. 그 책이 가지고 있는 내용은 큰 깨달음을 주고, 만족스러운 답을 건넬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책이 누구에게나 고전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학생들에게 고전 리스트를 손에 쥐어주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은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너는 너의 인생에 어떤 질문을 가지고 있니?"
너의 인생에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지를 묻고, 그 질문을 해결할 수 있는 고전이 무엇인지 찾도록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 역시도 리스트를 따라 고전 읽기를 멈추었습니다. 그렇다고 고전 읽기를 멈춘 것은 아닙니다.
리스트를 훑어 나가기 전에 내가 어떤 질문 위에 서 있는지를 되물어보았습니다.
그러고 나니 모든 고전이 다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질문을 해결해줄 고전만이 의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리스트를 따라 체크를 하며 만족감을 느끼는 것을 넘어 내 인생의 질문을 해결해가는 기쁨을 누리게 된 것이지요.
고전 읽기!
리스트를 따르지 말고, 질문을 따라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