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과 배움의 영성_파커 파머
벌써 20년이 된 것 같습니다. 아마 지금은 환타지 장르 영화의 고전으로 분류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SF 영화를 좋아하는 저는 역사물에 그다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반지의 제왕'
이 영화가 처음 개봉되었을 때, 이 영화가 '역사물'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1~3편이 개봉되면서 여기 저기에서 호평이 이어지고, 약 1,500만명의 관객이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 이후에 집에서 시리즈를 몰아보면서 영화관에서 보지 못한 것을 땅을 치면 후회했고, 재 개봉을 했을 때 영화관을 찾는 늦은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환타지 영화의 대작, 반지의 제왕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프로도? 스트라이더? 또는 골룸? ㅋ
주인공은 '절대반지' 입니다.
절대반지는 무한한 권력을 상징합니다. 절대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넘나들 수 있고, 사람의 영혼과 정신을 사로잡아 자신의 힘 앞에 굴복시킬 수 있습니다.
절대반지는 인간의 깊은 욕망을 대변합니다. 모두를 굴복시키고 싶고, 모든 것을 제어하고 싶은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절대반지이기도 하고, 절대반지를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1561.01.22~1626.04.09)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무엇인가 배운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진짜 의미는 '지식이야 말로 진정한 힘(power)를 준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배운다는 것은 '힘'을 획득하는 것이고, 이 힘이야 말로 배움의 지향점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에 대해 유발하리라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620년 프랜시스 베이컨은<<신기관The New Instrument>>이라는 과학 선언문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아는 것이 힘'이라고 주장했다. '지식'의 진정한 시금석은 그것이 진리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힘을 주느냐의 여부다. 일반적으로 과학자들은 1백 퍼센트 정확한 이론은 없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 결과, 진리인가의 여부는 지식인가 아닌가를 판별하는 검사법으로서는 부족한 것이 되었다. 진정한 시금석은 유용성이다. 우리에게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는 이론이 지식이다."1)
실로 지식은 힘입니다. 근대 과학이 이 지식으로부터 탄생하였고, 과학은 '힘'이 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는 자연을 바라보는 두 전통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피타고라스-플라톤 전통으로, 17세기 데카르트의 전통으로 이어집니다. 이 전통은 자연을 영원한 질서를 포함하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로 바라봅니다. 자연은 영원한 질서를 표상하는 수학을 통해서 측정되어야 하며, 수치의 세계가 자연의 본질적인 모습입니다. 이를 '기계론적 자연관'이라고 합니다.
17세기 이전 중세는 '아리스토텔레스-스토아철학'의 관점으로 자연을 바라 보았습니다.
이 세계관은 자연을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로 바라봅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영향을 주고, 하나의 의미와 목적을 위해서 존재하는 자연입니다.
눈은 보기 위한 것이고, 혀는 맛을 감별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손과 발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하나의 몸이라는 전체의 부분으로 생명 유지라는 최종 목적을 공유합니다. 이를 '유기체적 자연관'이라고 합니다.
데카르트 이후 '인간의 이성'이 지식의 중심이 되고, 이성의 명확함을 나타내는 수학적 언어가 자연을 풀어내는 가장 적합한 언어로 등장하게 됩니다.
"근대 이전의 과학 책을 보면, 거기에는 수학공식이나 기하학적 도형이 등장하지 않는다. 반면 근대 이후 과학을 표방하는 문서에는 반드시 수학 공식이나 양적 계산이 등장한다. 언젠가부터 수학이 없는 과학은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17세기 과학에 일어난 혁명적 변화의 요체는 언어의 교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근대 이전, 특히 자연학의 언어는 자연언어였다. 반면 근대 이후 자연학의 언어는 수학이 되었다. 자연학의 언어가 자연언어에서 수학으로, 혹은 형식언어로 바뀐다는 것이 17세기 과학혁명의 도화선이다." 2)
유기체적 자연관에서 기계론적 자연관으로의 전회는 인간과 지식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유의미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자연의 일부인 인간은 이제 하나의 자극에 반응하는 '기계'로 전락하게 됩니다.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로 설명이 되어 버립니다.
생명의 신비는 사라지고, 모든 것은 아직 파악되지 못한 매커니즘일 뿐입니다.
17세기 이후 기계론적 자연관이 세계를 지배하며, 인간은 하나의 에너지로 취급받고, 더 많은 이익을 위한 효용적 가치로 점차 옮겨지게 됩니다.
"고대인의 사물 개념을 중심에 놓고 볼 때, 이런 존재론적 혁명은 일종의 빈곤화 과장이라 할 수 있다. 연장으로 정의된 새로운 물체에는 과거 사물이 향유했던 수많은 속성들이 모두 사라지기 때문이다. 사물은 공간성이라는 최소의 규정을 남기고 그 외의 풍부했던 규정성들을 모두 상실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데카르트가 제시한 사물 개념 속에서 상실된 그 규정성들을 대략 여섯가지 정도로 꼽을 수 있다. 질, 운동, 종차(소속), 위계, 목적(의미), 영혼(내명성)이 그것이다."3)
존재가 기계의 부품으로 전락되어 버리면서, 그것은 소속도 없고, 위계도 없으며, 목적도 없고, 영혼도 없는 무미건조한 어떤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인간도 그러한 존재로 점차 굳어졌으며, 지식이란 생명이 없는 어떠한 것으로부터 에너지(힘)을 추출해내는 수단이 되어버린 것이 근대화의 어두운 단면입니다.
생명을 상실한 세계 앞에선 지식인들은 그 물질을 활용하여 힘을 구축하고자 했습니다.
1, 2차 세계 대전은 근대의 세계관이 인간의 욕망을 어디로 이끌었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이며 단적인 사건입니다. 눈부신 발전을 거듭한 근대 과학은 인류 전체를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는 핵무기를 만들어 내고 말았습니다. 기대했던 유토피아의 모습이 아니었다는 점은 명백합니다.
"다큐멘터리는 끔직한 영상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내게 가장 끔찍했던 것은 우리 꿈에 나타나곤 하는 그 버섯 구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교육받은 지식인들이 그 같은 악마적인 목적을 위해 그렇게도 열정적으로 매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떻게 지식이 우리를 우리 자신도 원하지 않는 목적을 향해 몰아갈 수 있는지를 볼 수 있었다."4)
우리 인간이 서로 연결되고, 목적과 의미를 부여하는 세계관에서 차갑고, 무의미하며, 오로지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통제되는 세계로 이동했을 때, 지식이란 힘을 구축하기 위한 폭력으로 전환되어 버렸습니다.
경쟁하고, 이기고, 권력을 쟁취하고, 지배하고, 빼앗기를 잘 하기 위한 교육은 인간성의 상실을 유발하고, 우리를 점점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고등 교육을 받은 이들로서, 세계를 분석하고 조작의 대상으로 다루는 앎의 방식, 세계에 대한 지배를 목적으로 삼는 앎의 방식을 학교에서 교육 받았다."
파커 파머는 우리의 배움이 지배와 조작으로부터 치유와 회복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에서 발원하는 지식의 목표는 깨어진 자아와 세계의 재연합과 재구축이다. 자비에서 나온 지식이 추구하는 바는 창조 세계의 착취와 조작이 아니라, 세계와 자신의 화해다. 자비를 동기로 가진 지성은, 마음이 사랑을 향해 뻗어 가듯 지식을 향해 뻗어 간다. 여기서 앎의 행위는 곧 사랑의 행위이며, 타자의 실재(reality)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포용하는 행위, 타자로 하여금 자신의 실재 속으로 들어와 그것을 포용하도록 허락하는 행위다. 이러한 앎에서는, 우리는 하나된 공동체의 지체들로서 남을 알고 나를 알리며, 우리의 앎은 공동체의 유대를 다시 엮어 주는 방법이 된다."
파커 파머는 배움이란, 대상을 알아가고, 관계 맺으며, 대상을 받아들이고 또한 그 안으로 들어가는 행위라고 말합니다.
얼마전 '도움과 나눔'이라는 모금 전문 단체의 최영우 대표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학교 모금 컨설팅 관련하여 미팅을 하고 있었는데, 최영우 대표께서 참으로 인상깊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진리는 위험한 겁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생소함에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진리는 좋은 거 아닌가? 왜 위험하지?"
최형우 대표의 말은 이랬습니다.
"진리는 위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아는 순간 그것을 받아들이고, 내 삶을 변화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학교의 진짜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요? 학교에 기부하고자 하는 분들이 선생님의 학교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게 된다면, 학교 공동체는 이를 받아들이고, 변화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진리는 참으로 위험한 것입니다. 진리는 변화를 강요합니다."
파커 파머가 말한 배움이란, 단순히 죽어 있는 대상을 파악하고, 나의 힘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 배움은 대상과 관계를 맺는 것이며, 그 대상을 받아들이고, 나도 그 대상 안으로 들어가는 상호 확장적이며, 치유적 행위입니다. 나의 관점에서 대상을 난도질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내가 하나로 연합하는 행위입니다.
우리 사회의 교육은 과연 어떠한가요? 파멸의 교육인가요? 치유의 교육인가요?
며칠 전 분당의 한 남학생이 고귀한 목숨을 스스로 끊었습니다.
매년 수능이 치뤄지는 날에는 삶을 다 살아보지도 못한 어린 영혼이 사라집니다.
밟고 이기지 않으면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 교육적 이상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교육은 타인과 연대하며, 서로를 치유하는 그것이 될 수는 없는 것인지 깊이 생각해보게 됩니다.
1) 출처:https://m.cafe.daum.net/Mtrip/Wxip/73
2), 3) 김상환 교수, 근대적 세계관의 탄생: 데카르트적 전회
4) 파커파커,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