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항상 내게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는 존재였다. 얼굴은 얼핏 봤을 때 60은 넘어보였다. 아니 어쩌면 50 초반일지도 몰랐다. 오랜 길거리 생활에서 오는 흔적이 그를 더 나이 많아 보이게 만드는 듯 했다. 머리와 수염은 희끄무리 했으며 자주 씻지 못해 피부는 거뭇거뭇했다. 주름인지 때인지 알 수 없는 흔적이 얼국 곳곳에 묻어 있었다. 그는 항상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있었다. 삶의 생기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모든 의욕을 잃은 채 그저 마지막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그도 처음부터 노숙생활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무엇이 그를 거리로 이끌었을까. 아니 내몰았을까. 그는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분명 처음부터 밑바닥 인생은 아니었으리라. 그에게도 의지가 있고 꿈이 있고 삶이 있던 시절이 분명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의 얘기를 들을 수 있을 날이 올까? 나는 그에게 물을 수 있는 용기가 없었으며 그에겐 자신의 삶을 이야기할 의지가 없었다. 그 누가 노숙인에게 말을 붙일 수 있을 것이며 그 누가 회한뿐인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한 달, 두 달, 반 년을 넘게 그 곳을 지나갈 때마다 그는 항상 같은 자리에 있었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옷 몇가지, 덮을 거리 몇가지가 더해진 것 말고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 것들은 어디서 가져오나 궁금하기도 했다. 아마 이들을 돕는 지원센터에서 주지 않았을까 어림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한 가지 그에게만 보인 특징이 있다면 그의 주변엔 술병이 없었다. 다른 노숙인들은 항상 술과 함께 했다. 아침에도 취해있는 사람이 여럿이었다. 하지만 그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봤을 땐 그랬다. 생기 잃은 눈이었지만 취한 눈은 아니었다. 술이 그를 이 자리로 이끈 것일까. 술 때문에 큰 실수를 한 것일까. 그렇기에 술을 다신 하지는 않는 것일까. 의지를 놓아버린 삶에 그래도 자신만의 규칙이 있는 것일까. 그를 보는 것은 갈 때 10초, 올 때 10초 정도를 보는 것이 전부이지만, 그는 궁금증을 여럿 불러 일으켰다.
그렇게 10월이 됐을 무렵, 터널의 보수 공사가 시작되며 통행이 막혔다. 나는 궁금했다. 그는 그렇다면 어디로 옮겼을까. 아마 근처로 옮기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 근처엔 비바람을 피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시간 나는 주말, 터널 인근을 돌아봤지만 노숙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원센터가 그들의 거처를 마련해준 것일까. 아니면 전혀 다른 곳으로 또다시 이주를 한 것일까. 집 없는 자들에게 이주란 표현이 알맞은 것일까. 그들은 이 표현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보수 공사가 끝나면 그들은 다시 돌아올까. 그렇게 그들과 그는 그곳을 떠났다.
보수공사는 넉 달여간 지속됐다. 나는 다른 길을 통해 다녔고, 그 터널과 그는 점차 내 머릿 속에서 잊혀지고 있었다. 그가 다시 떠오른 것은 터널의 통행이 재개되고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였다. 이전의 어두컴컴하고 더럽던 느낌의 터널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터널은 여느 건물의 실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었다. 벽에는 그림과 사진들이 걸려 있었고 조명을 새로해 완전히 밝은 환경이었다. 이전엔 다니는 사람만 다니는 길이었다면 이젠 많은 사람이 이 터널을 통해 다니고 있었다. 아마 이런 곳으로 그가 다시 찾아오긴 쉽지 않을 것이다. 생기를 잃은 그가 있기엔 이곳은 이제 생기가 도는 공간이었다. 버려진 터널조차 다시 사람이 사는 곳으로 바뀌었다. 그가 살던 곳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그를 다시 볼 수 없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왜 그 터널을 택해서 살고 있었을까. 그 터널도 처음부터 그렇게 낡고 더럽진 않았을 것이다. 그의 인생도 마찬가지였으리라. 터널이 낡아버렸듯 그의 인생도 어느순간 낡고 버려졌을 것이다. 그렇게 생기를 잃었을 것이다. 그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또 다른 낡은 터널을 택해, 그 터널과 같은 삶을 살고 있을까. 아니면 완전히 뒤바뀐 이 터널처럼, 그의 삶도 다시 생기를 되찾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을까. 그는 떠나서도 여전히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