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단편선 삶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arpeBM Aug 22. 2023

사소한 이유 (6, 完)


[6]

경수는 본인이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수없이 봐온 오디션이었고 이젠 적응이 되었으며 이전처럼 긴장은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오디션조차 이전과 마찬가지로 본인이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수는 스스로에 대해 약간의 짜증이 났다. 주변에는 수많은 지망생들이 각자만의 방식으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대사를 되뇌이는 사람, 아, 아 소리를 내보며 목을 푸는 사람, 별 생각 없이 휴대폰을 하고 있는 사람, 서로 아는 지인인지 약간의 담소를 나누는 사람도 있었다. 경수는 별 생각 없이 그들을 관찰하며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때는 경수는 이런 자신의 습관 때문에, 사실 본인이 그렇게 간절하진 않다고 스스로 생각하기도 했다. 마지막까지 어떻게든 쥐어 짜내가며 준비해야하지 않나라고 생각했지만 경수는 항상 그런 식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런 점이 그의 한계라면 한계일 것이다. 그 때 누군가가 뒤에서 경수의 어깨를 두들겼다. 경수는 무슨 일인가 뒤를 돌아봤다. 예상치 못한 사람에 경수는 놀라움과 당혹감을 드러냈다. 경수가 부러움과 열등감을 지니고 있던 친구, 대훈이었다.

“어? 대훈, 무슨 일이야? 이 영화 캐스팅 된 거야?” 경수는 본인이 쿨해 보이기 위해서 노력했다.

“캐스팅은 무슨, 나도 오디션 보러 온 거야”

“너도 오디션을 봐야해?”

“그냥 운 좋게 하나 찍은 건데, 나도 계속 봐야해”

“그렇구나”

경수는 대답과는 달리 그래도 대훈은 본인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이미 주연으로 데뷔한 경력, 그 사실이 아니더라도 대훈의 연기가 본인의 실력보다 뛰어나다 여겼다. 하지만 그런 속마음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오디션 끝나고 시간 괜찮아?” 대훈이 물었다. 경수는 오디션이 끝난 뒤 마땅히 할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일이 정석과 약속한 마지막 날이기에 정석과 술 한 잔이라도 해야 하나 했지만 정해진 약속도 아니었고 반드시 그럴 필요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경수는 스케줄이 있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대훈과의 자리가 왠지 모르게 불편할 것 같았고 피할 수 있으면 그러려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까지 핑계거리를 대는 것이 더 구차하게 느껴졌다. 

“아니 뭐 없어” 경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술 한 잔이나 할래?”

“그래 좋지. 근데 넌 안 바빠? 이제 연예인이잖아” 결국 경수는 자격지심을 드러내고 말았다.

“연예인은 무슨, 아무도 몰라. 그렇게 막 바쁘지도 않아”

“그래 그럼. 이따 보자. 오디션 잘 보고” 경수는 말을 하고서 누가 누구한테 잘 보라고 하는 지를 깨닫고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최경수 지원자” 얼마 안 있어 경수의 차례가 되었다. 경수는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는 안내자를 따라 오디션장으로 향했다.

 

=====================

 

“여기 앉으세요” 면접관 중 가장 어려 보이는 사람이 정석에게 권했다. 정석은 인사를 하며 면접관의 얼굴을 살펴봤다. 본인과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사람이 한 사람, 조금 더 많아 보이는 한 사람, 연배 차이가 딱 봐도 나 보이는 사람까지 세 명이 맞은편에 앉아있었다. 정석은 그래도 혹시나 정석을 면접에서부터 반겨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안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미 내정자나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화요일 이전까지의 일이었다. 부정적 기사에 대한 정석의 대응이 늦은 이후로는 달랐다. 아니 실제로 달랐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정석은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의 예감이 맞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연차도 적은 연차는 아니고 하니까 필요한 질문들만 바로바로 물어 볼게요” 가장 높은 직급으로 보이는 면접관의 말이었다.

“나름 그 직장에서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거 같은데 이직하시려는 이유가 뭐에요?”

정석은 미리 준비했던 그럴 듯한 대답을 했다. 대답을 하면서도 본인이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다고 여기진 않았지만 면접이란 것이 으레 그렇듯 어느 정도의 거짓은 섞여있기 마련이었다. 몇 번의 이런 저런 상투적인 문답이 오갔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우리가 이번에 뽑으려는 자리는 레거시 미디어 전문가가 필요해서에요. 그동안 IT기업이라고 그 쪽 경로를 통한 홍보에 치중하다 보니까 레거시 쪽 통로는 부족했더라구요. 아무리 뉴미디어 뉴미디어 해도 아직까진 그래도 중요한 홍보 매체니까요. 그래서 김정석 씨 경력에 더 눈이 갔었던 거도 사실이구요. 그런데” 정석은 뒤이어질 말이 무엇일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아직 알지 못했다.

“며칠 전에 김정석 씨가 맡았던 ㅇㅇ 게임이었나요? 대처가 좀 늦었다고 할까 아쉬웠던 거 같은데 이 부분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정석은 쉽게 대답을 꺼내지 못했다. 모든 것을 사실대로 얘기할 수 없을뿐더러 어디까지 얘기해야 할지 몰랐다. 사실 얘기하면 할 수 있었지만 순간적으로 그럴 판단을 할 수 있을 만큼 정석은 지금 냉철하지 못했고 본인의 잘못이었단 생각에 그 질문 자체가 정석을 위축시켰다.

 

===

 

“네 바로 시작해주세요” 

경수는 본인이 준비해간 연기를 시작했다. 경수의 연기는 무난하게 흘러갔다. 하지만 오디션 심사를 맡은 사람들은 경수의 연기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경수는 이런 반응을 크게 의식하지 않은 채 연기를 지속해갔다. 연기가 끝날 때까지 큰 실수는 없었다. 연기가 끝난 후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심사위원들은 서로를 멋쩍은 듯 바라보았고 경수는 그저 그들의 반응을 바라만본 채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 다른 연기 준비된 거 있나요?”

“예, 10초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경수의 머리는 어느 때보다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다른 연기를 해달라니 내가 준비해 온 연기가 별로였나. 그래도 가능성은 있는데 아쉽다고 생각해서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것일까. 잘하는 연기를 한 번 더 보고 싶어서였을까. 아마 전자의 가능성이 높겠지. 그러면 어떤 연기를 해야 하지. 이전 오디션에서 했던 연기? 아냐 그건 이미 떨어진 연기야. 그럼 이전에 최종 오디션 직전까진 갔던 연기? 근데 그건 아직 개봉도 안한 작품 오디션 대본이었는데. 어떤 연기를 해야 하지. 어떤...

“준비 되셨나요?”

“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

 

“고생하셨습니다.”

정석은 잊고 지내던 좌절감을 느꼈다. 너무 오래되어 잊고 있었던 느낌이었다. 어쩌면 처음 느껴보는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본인이 뜻하던 바가, 그것도 거의 눈앞에 까지 다가왔던 목표가 무너지는 허망함. 그저 이직 시도 한 번 실패한 것일지 모르지만 이런 실패조차 정석에겐 익숙지 않은 것이었다. 정석은 항상 실패를 피하기 위한 선택을 해왔고 본인이 할 수 있는 안전한 선택들을 해오며 커리어를 닦아오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기에 이직 또한 본인이 확실히 가능하다는 확신이 서기 전까지 미뤄온 그였다. 하지만 그의 계획이 일그러지는 순간이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을지라도 정석이 느끼는 실망감과 절망감은 생각보다 크게 그에게 다가왔다. 정석은 쉽사리 면접 본 회사 주변을 떠나지 못했다. 그는 조용히 구석으로 가 담배 한 대를 물었다.

 

===

 

오디션을 마치고 나온 경수는 윤재가 남긴 문자를 확인했다.

‘끝나면 연락해’

경수는 곧바로 윤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경수의 표정만으로는 오디션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만족스러움이나 실망감 비슷한 것도 그의 표정에선 나타나지 않았다.

“여보세요”

“지금 끝났어”

“잘봤.. 고생했다”

“고생은 무슨. 그냥 시원섭섭하다”

“그래도 기대 한 번 가져봐. 기대 한다고 돈 드는 것도 아니고. 너 연습할 땐 괜찮았어”

“싫다. 이젠 실망하는 것도 그만해야지”

“어찌되든 그래도 고생했어.”

“형 뭐해 이제”

“난 뭐 당장 오늘은 없지? 뒤풀이라도 하게?”

“좀 이따 대훈이하고 한 잔하기로 했거든. 형도 올래?”

“대훈이? 알았어 그럼 이따 봐”

경수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대훈을 단 둘이 만날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윤재가 자리하면 본인의 비참함을 약간은 가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

 

미현은 집에 돌아온 정석이 표정이 좋지 못한 것을 눈치 챘다. 정석의 면접이 뜻대로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면접이 어땠는지 안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 괜찮았어?”

미현은 애써 에둘러서 물었다. 정석도 어떤 말을 택해 대답해야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끝났어 이제”

“끝나다니?”

“언론 대응 하나 못하는 놈을 누가 받아주겠어”

“잘 안되면 다른 데 가면 되지. 아니면 그 회사 계속 있어도 되고” 미현은 달래주기 위해 노력했다.

“내세울 장점이 물경력 돼버렸는데. 그 회사에서 개고생하면서 지금까지 버틴 거 아무 의미도 없고”

“한 번 실수한 걸로 그렇게 안 좋게 볼 회사 같으면 아예 안가는 게 나아 얘”

“엄마, 안 그런 데가 없어. 안 그런 데가 없다고. 다들 누구 실수 한 번 안하나 다들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한 번이면 끝이야. 아무도 실수한 거 안 봐준다고”

“다시 기회 올 거야”

“그 기회가...” 정석은 순간적인 울컴임을 참았다.

“기회가 안 온다니까”

미현은 현재 정석의 감정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녀도 그녀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아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엄마가 살아보니까 꼭 목표대로 안 되도 괜찮더라. 아니 목표 좀 없으면 어떠니? 그냥 편하게 살아. 그래도 괜찮아”

“아니 사람이 그렇게 살면 막 사는 거...” 정석은 미현에게 언성을 높이려 따지려 들다가 순간 멈칫했다. 비슷한 대화를 다른 누군가와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처럼 상대와 마찰이 있었다. 정석은 정석의 인생관을 설득하려 했지만 상대는 쉽사리 동의해주지 않았고 정석은 그런 그에게 답답함을 느꼈다. 정석은 같은 말을 동생 정민에게 했단 사실을 기억했다.

 

“사람이 그렇게 살면 막 사는 거하고 뭐가 달라”

“아니 그게 왜 막 사는 거야. 사람이 좀 편하게 살고 싶을 수도 있지. 그렇게 막 아둥바둥 살아야 돼?” 정민도 정석에게 지지 않으려 했다.

“그거 네가 몰라서 그래. 어디서 대학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딴 말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그거 다 대학 못가서 본인들 합리화하려고 하는 말이라고. 재수 한 번 해보라니까. 남들은 하지 말라 그래도 하려고 하는데. 넌 뭐가 부족해서 안 하려고 하냐.”

“형은 뭐 인생 얼마나 살았다고 아직 대학 졸업도 못한 주제에. 걔네들은 재수가 하고 싶은 거니까 하는 거고 나는 하기 싫으니까 안한다니까”

“몇 번을 말해. 사람이 하고 싶은 거만 하면서 살 수 없다니까”

“아니 그래도 하기 싫은 거 안 하면서 살려고 노력할 수 있잖아”

“넌 왜 노력을 그런 쪽으로 하려고 해”

“그러면 뭐 좋은 노력, 나쁜 노력 따로 있어? 좀 그냥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살게 냅두면 안돼?”

“됐다. 내가 너하고 말을 말아야지. 너도 몇 년 만 지나도 뭔 말 하는 지 알거다.”

정석은 그 말을 끝으로 정민의 방을 나가버렸다. 정석은 미현에게 동생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했다.

“말을 안 들어 말을”

“내비둬.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부모인 우리도 뭐라 안하는데 너무 뭐라 하지마”

“엄마 아빠가 뭐라 안하니까 나라도 해야지”

정민은 화가 잔뜩 났는지 정석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집을 나갔다.

 

“그냥 오늘 면접 본 거 잊어. 막살기는 누가 막살았다고” 정석이 한동안 말을 잊지 못하자 미현은 오히려 불안함을 느끼고 무슨 말이든 본인이 해야 할 것 같았다.

“엄마...”

“왜?”

“나 정민이 한테 잘못한 거 같아”

미현은 정석의 말뜻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에게서 갑작스런 심경의 변화가 일었음은 알 수 있었다. 미현은 그런 정석을 잠시 안쓰럽게 쳐다보고는 안아주었다.

“괜찮아”

정석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

 

테이블엔 먹다 남은 안주거리들이 놓여 있었고 한 쪽 구석엔 빈 소주병과 맥주병이 여럿 가지런히 놓였다. 경수, 대훈, 윤재 모두 약간의 취기가 돌고 있는 것을 느꼈다.

“더 마실 거야?” 윤재가 물었다.

“딱 한 병만 더 하자. 저기요!” 대훈이 소주 한 병을 더 주문했다.

“그래서 오디션 안 되면 뭐하려고?” 대훈이 경수에게 물었다.

“야 될 거야. 될 건데 뭘 그런 걸 물어봐” 윤재가 대신 대답했다.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어. 차차 생각해봐야지”

“왜 너 같은 배우를 아직까지 안 뽑는지 모르겠어. 이거 달래주려고 하는 말 아니야. 취해서 하는 말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한테 더 해보라고 할 수도 없고 이게 참... 그렇다” 대훈이 새로 받은 소주병을 까며 물었다.

“못하니까 안 뽑혔지” 경수는 웃으며 대답했지만 씁쓸함이 묻어있었다.

“그냥 내가 생각하기에 그렇게 간절했었냐? 라고 물으면 잘 모르겠어. 그랬던 거 같진 않아. 그래서 안 된 거지 뭐” 경수는 본인의 생각을 더 꺼내 놓았다.

“그래서 그 추가 연기. 그래 오늘 그건 어떤 거 했어?” 윤재가 물었다.

“아 그거? 히로카즈 영화 중에... 그 뭐였더라 갑자기 제목이 생각이 안 나네. 아무튼 거기 나오는 거 했는데”

“얘는 참 그 사람 영화 좋아해. 야 이왕 할거면 한국 영화에서 가져왔어야지 일본 거에서 가져오면 되냐.” 윤재의 농담 섞인 타박에 경수는 가벼운 웃음으로 답한다.

“뭐 어때? 솔직히 나 그 사람 영화로 얘 연습하는 거 봤을 땐, 진짜 연기 존나 잘한다. 이 생각 밖에 안 들었어.” 대훈은 진심을 담아 말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가득찬 소주잔을 부딪혔다. 술잔을 비우고 경수가 말했다.

“그 땐 재밌었어. 재밌었지... 지금은 모르겠어. 너라도 잘 돼서 다행이다” 경수는 대훈을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고맙다” 대훈이 대답했다.

“솔직히 나. 너 존나 부러웠다. 그래서 예전처럼 연락도 잘 못했어. 내가 존나 한심했거든”

“뭘 또 얘기가 그렇게 되냐” 대훈은 낯간지러움, 약간의 미안함, 안타까움을 느꼈다.

“오해는 하지마. 막 네가 질투 났다거나 쟤도 되는데 난 왜 안 되는 걸까 이런 얘기가 아니야. 막 난 그렇게 열심히 했던 거 같지는 않거든. 아무튼 그래서 얘 이번에 나온 영화도 미루다 미루다 저번 주말에 봤단 말이야. 근데 씨발 연기를 존나 잘해. 진짜 존나 잘하는 거야. 욕심도 있어 보이고 간절함도 보이고. 근데 다시 말하지만 난 아니잖아? 그런데 어쨌든 다시 생각해보니까 내가 얘를 어려워할 필요가 없었어. 윤재 형, 그렇잖아. 얘가 잘 나가면 나 잘나가는 배우 친구 있다. 여기저기 존나 자랑할 수 있는 건데. 내가 얘 어려워하면 그거 자랑도 못할 거 아냐. 아무튼 난 네가 더 잘 됐으면 좋겠다 이 말이야”

“이 새끼 취했네 취했어” 그러면서 경수에게 술 한 잔을 더 따라주는 윤재였다. 경수는 자연스레 술잔을 들어 술을 받아준다.

“아니 취했다면서 술 더 따라주는 건 뭔데?” 대훈은 경수의 진심이 낯간지럽기도 하고 윤재의 행동이 우습기도해서 애써 대화의 주제를 돌리려 했다.

“야. 괜찮아” 경수는 웃으며 대훈에게 대답했다.

 

============

 

경수가 정석의 집에 돌아온 시간은 열두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왔어?” 정석에 앞엔 몇 가지 마른안주와 과자거리들이 놓여있었고 빈 캔 하나가 놓여있었고 정석의 손엔 이제 막 개봉한 듯한 캔맥주가 들려있었다. 티비는 켜져 있었지만 소리는 들릴듯 말듯했고 조명도 식탁등 하나만 켜져 있었다. 경수는 왠지 집안이 적적하다고 느꼈다. 경수는 정석의 맞은편에 가 앉았다.

“왜 혼자 마시고 있어?”

“좋겠다 넌 마셔줄 사람 많아서”

“남는 거 있어?”

“냉장고 안에”

경수는 자연스레 정석의 냉장고를 열어 캔맥주를 꺼냈다. 

“넌 오디션 많이 해봤잖아” 정석이 물었다.

“뭐 그렇지?”

“그럼 많이 떨어져 봤을 거 아니야. 오해는 하지 말고. 그냥 궁금해서 그래”

“뭐가 궁금한데?” 경수는 직감적으로 정석의 면접이 좋지 못했을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떨어지면 느낌이 어때?”

“형도 뭐 이전에 다른 거 떨어져 본 적 있을 거 아냐? 없어?”

“가만있어보자. 운전면허?”

“... 지금 재수 없어 보이는 거 알아?” 둘은 가볍게 웃었다.

“나 잘 나갔어” 정석은 오히려 우쭐댔다.

“떨어졌을 때 느낌... 오늘 느낌 얘기해줄까?”

“왜 안됐어?” 정석은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내가 지금 누구 앞에서 힘들다고 투정부리고 있는 것일까. 더 힘들면 힘들었을 텐데 괜한 것을 물어보진 않았나. 위로가 필요한 건 나뿐만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결과야 아직 나온 건 아닌데, 지금 짬밥이면 얼추 알 수 있으니까.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아무렇지 않다면 거짓말이고, 그냥 뭐... 그냥 그러려니 해 이젠”

“어떻게 그게 돼?” 정석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오늘 면접 망했어?” 답답하다 참지 못한 경수가 직구를 던졌다.

“어...” 정석의 목소리는 기어들어갔다.

“누가 보면 인생 조진 줄 알겠어”

“조졌지 뭐”

“퇴사하고 이직준비 한 것도 아니잖아. 아직 멀쩡한 회사 있지. 혼자 사는 집 있지”

“월세야”

“난 그 월세 낼 능력 없어서 아직도 싫은 집에 빌붙어 있는데?”

“집에 있는 게 좋은 거야. 나와 살아봐”

“형은 사이가 좋으니까. 난 형 그게 부럽더라. 신기하기도 하고. 난 못해 그렇게”

“그럼 뭐해... 죽은 동생 놈하고는 못 그랬는데” 

정석은 남은 맥주를 모두 벌컥 들이켰다.

“그러니까 넌 나처럼 되지 말라고” 어색한 듯 정석은 괜히 했던 충고를 또 했다.

“일본 영화인데 거기선 형이 죽어. 좀 취했으니까 두서없어도 이해해줘” 경수는 갑자기 영화에 대해 설명하려 했다.

“내가 거기서 죽어? 밑도 끝도 없이 죽는대?”

“아니 함 들어봐, 그 형제가 있는데 형이 죽어. 근데 그 동생은 아버지하고 사이가 안 좋아서 잘 안보고 지내는데, 형 기일에만 집 찾아오고 이런단 말이야”

“그런데?” 정석은 흥미 없는 듯 시큰둥하게 대답했지만 경수는 그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아무튼 이제 또 기일이 돼서 찾아왔는데 사이가 안 좋으니까 어떻겠어? 말도 잘 안하고 해도 밉게 하고 이런단 말야. 그러다가 막 어떻게 또 사이가 좋아지는 거처럼 보여. 그래서 아버지가 둘째한테 나중에 네 아들 데리고 셋이서 같이 축구 보러 축구장 가자 이런단 말이야”

“그래. 영화에서도 그렇게 화해하네”

“끝까지 들어봐. 그래서 같이 가자고 했는데? 결국 같이 안가. 결국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지”

“뭔 영화가 그래” 정석은 못마땅한 듯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이거야. 결국 안돼. 결국 틀어지면 어떻게든 안 되는 거야. 되는 거였으면 세상사람 형처럼 후회하는 사람 하나도 없겠지. 다 후회하면서 살잖아”

“몰랐으니까 그런 거고 넌 아니까 다를 수 있을 거 아냐”

“그냥 난 지금이 편해. 혹시라도 나중에 후회생기면 그냥 그 때 후회할래. 괜히 죄책감 덜자고 억지로 지금 그러고 싶지 않아”

정석은 경수의 말을 듣고 잠깐 상념에 빠진 듯 했다.

“정민이가 왜 너하고 친하게 지냈는지 알겠다.”

 

===========

 

경수는 몇 안 되는 본인의 짐을 챙겼고, 경수가 짐을 챙기는 동안 정석은 이사 이후 그동안 거들떠보지 않았던 본인의 상자들을 확인했다. 상자를 하나 둘 뜯으며 내용물을 확인하던 중 하나의 상자가 정석의 눈을 사로잡았다. 상자에는 손목시계가 들어있었다. 정석은 시계를 들고서 경수에게로 향했다.

“이거 정민이 주려던 건데 너 가질래?”

“그래도 돼?”

“가져. 내가 가지고 있을 이유도 없고. 싼 거야.”

경수는 시계를 받아들었다. 따로 고맙단 말을 하진 않았지만 정석도 들은 셈 쳤다. 정석은 아파트 1층 현관까지 경수를 바래다주었다.

“점심이라도 먹고 가지”

“아냐. 집 가서 먹어야지. 그니까 우리 집 아니 그러니까 내 집”

“그래. 태워다 줘?”

“됐어”

가려는 경수를 정석은 또 멈춰 세운다.

“또 왜”

“그래서 누가 더 거지 같아?”

“어?”

“처음 네가 우리 집 들어온 이유. 정민이하고 내기한 거. 그래서 누구 가족이 더 거지 같은데?”

“아 그거?”

“됐어 말하지 마”

“왜? 내가 누구라고 할 줄 알고”

“빨리 가기나 해”

“붙잡을 땐 언제고. 간다 가”

정석은 떠나는 경수에게 한 마디를 더했다.

“연락해. 밥이나 종종 먹자”

매거진의 이전글 사소한 이유 (5)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