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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드, 우리 이야기를 담은 너와 나의 케이팝

<더 송라이터스> 김영대

by 김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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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우리들의 발라드’라는 프로그램이 화제였다. 그것은 오디션을 가장한 추억 소환이었다. 평생 잊지 못할 어느 순간, 정말이지 누구 곁에나 발라드 한 곡쯤은 있는 듯 보였다. 두말할 것 없이 세상 모든 발라드의 주제는 사랑. MZ 세대 참가자들이 섬세하게 되짚어간 노래들은 음악으로 듣는 사랑의 심리학이었고, 이별의 진화론이었다. 발라드를 향한 한국 사람들의 거대한 그리움은 프로그램에 대한 짙은 반응이 증명했고, 그 증명은 잠든 줄 알았던 발라드의 어슴푸레한 기억을 실체로서 깨워냈다.


얼마 전 ‘우리들의 발라드’의 주석 같은 책이 나왔다. 어쩌면 사랑, 이별을 경험했던 이들을 위한 감정 매뉴얼로도 읽힐 책의 제목은 ‘더 송라이터스’다. 조금은 추상적인 제목만으론 작곡가에 관한 내용으로 읽힐 만하다. 아니었다. 제목이 가리킨 ‘송라이터’는 작사가였다. 저자 김영대는 왜 작사가도 송라이터인지를 설명하기 위한 에피소드 한 토막을 들려준다. 장소는 음악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과의 모임 자리. 한 베테랑 음악 PD와 랜덤으로 나오는 노래 작곡가 맞추기 게임을 한 그는 디온 워윅의 ‘That’s What Friends Are For’에서 곡을 쓴 버트 바카락이 아닌, 가사를 쓴 캐롤 베이어 세이거를 외쳤다. 저자는 이 일을 계기로 흔히 작곡가로 번역하는 ‘송라이터’가 사실은 작사가이기도 하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다. “선율에 녹아 있는 문학적 감수성과, 글에 실린 음악적 리듬감은 결국 같은 것이 아닐까.” 김영대의 생각은 여기까지 갔다. 이 책이 ‘가질 수 없는 너’라는 노래를 두고 정시로의 멜로디보다 강은경의 노랫말이 지닌 천재성을 더 조명한 건 그래서였다.


사실 위 내용은 송라이터가 작사가를 뜻하기도 한다는 주장의 파편 같은 논거다. 김영대는 사유의 폭을 좀 더 넓힌다. 우리 정서를 지배했고, 가요 시대에서 케이팝 시대에 걸쳐 한국 고유의 특성을 구축해 온 음악에 대한 줄기를 새롭게 잡을 수는 없을까? ‘이야기’의 흐름과 맥락을 제일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음악은 뭘까. 가장 한국적이면서, 노랫말과 멜로디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음악. 저자에겐 그게 바로 발라드였다. 이 고찰은 일본인 우자키 류도가 곡을 썼으되 박건호가 붙인 한글 노랫말 덕분에 나미의 ‘슬픈 인연’이 대중의 귀에 안착한 것처럼, 작사가도 작곡가만큼의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거듭 수렴됐다.


정훈희의 ‘안개’가 나온 70년대 말부터 트로트(뽕짝)에 대항해 신가요의 이름표로 쓰기 시작한 ‘발라드’. 이 땅에서 발라드란 한마디로 세련됨이었다. 과거와 작별한 모던이었고, 옛 것을 극복한 낭만이었다. 요컨대 발라드는 한국 대중음악의 완전히 새로운 경향, “그야말로 ‘뉴웨이브’ 가요”였다. 이 책이 뼈대로서 가져가는 단 하나 가치라면 바로 이것이다. 발라드가 지닌 생명력, 영향력의 본질이란 곧 발라드가 지닌 세련미였다. 본격적으론 80년대 중반부터, 가령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와 나미의 ‘슬픈 인연’, 이광조의 ‘당신을 알고부터’가 나온 1985년이 한국형 팝 발라드의 원년이었던 셈이다.




발라드의 현대성 또는 현재성은 피아노·키보드가 중심이 된 ‘쿨시크’함에 있다. 김형석과 유정연, 신재홍 등 80~90년대 ‘음대 작곡과’ 출신들이 그중 한 축을 이루었고, 그 원류로서 유재하와 조동익이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거기서 뻗어 나온 김현철과 유영석을 비롯해 독보적인 자기 세계를 지녔던 이영훈과 윤상, 발라드 가요사에 한 획을 그은 부활의 김태원, 솔로로서 좋은 발라드 곡들을 들려준 김윤아, ‘찌질남’의 간판 송라이터였던 정석원(015B)과 유희열(토이), 그 역사에 ‘좋니’라는 곡으로 한 큰 술 기여한 윤종신이 책 안에서 줄줄이 호출된다. 8090 시대의 저 위대한 흐름은 다시 2000년대의 원톱 발라드 메이커 권순관, 2010년대의 선우정아와 헤이즈, 그리고 레트로 발라디어 최정훈(잔나비)으로 이어져 발라드의 질긴 운명을 증언한다. 이처럼 ‘더 송라이터’ 안에선 한국형 발라드의 역사와 의미, 탁월했던 창작자들, 그들이 쓴 노래들에 대한 주제별 분석이 말 그대로 발라드처럼 차분하게 흐른다.


비평과 감상의 중간에 선 이 ‘글로 된’ 발라드 플레이리스트엔 시티팝도 등장하는데, 저자는 윤수일이 자신의 곡 ‘아름다워’를 “펑키한 리듬을 입힌 발라드”라고 한 것에서 시티팝과 발라드의 접점을 찾아낸다. 시티팝은 곧 도시의 음악. 80년대 중반 이후 한국 발라드의 성취 역시 그 ‘도회적인 멋’이었다. 김영대의 발을 빌리자면 ‘구세대와 구분되는 현대성의 상징’이 곧 발라드의 정체였던 것이다. 심지어 책 마지막에서 “케이팝 이전의 케이팝”으로 상정한 구세대 가수들, 이를테면 정훈희, 패티 김, 정미조, 그리고 쎄시봉의 이장희가 공유하는 특징도 결국엔 ‘세련’이었다. 이 책에서 “송라이팅이 늘 세련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식으로 말하는 부분은 조용필의 ‘Q’에서가 유일하다.


발라드를 둘러싼 아티스트론, 장르론, 시대론을 거쳐 이 책이 도달하는 지점은 ‘어쩌면 발라드는 케이팝의 시발점일지도 모른다’이다. 꼭 음악 스타일의 현대성, 빛과 소금이 앞장선 형식상 실험 성향 때문만은 아니다. 에코의 ‘행복한 나를’을 다루며 “이제 막 시작된 아이돌 산업”을 얘기하고 있거나, “케이팝이 케이팝이 아니었던 시절”의 S.E.S.가 부른 ‘꿈을 모아서’가 등장해서도 아니다. 그것은 케이팝을 영미권 팝과 구분시키는 결정적인 요소, 바로 ‘우리만의 이야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애니메이션 영화 ‘케데헌’이 그처럼 화제가 됐던 이유도 그 안에 ‘한국의 서사’가 있어서였다. 지오디의 ‘보통날’을 쓴 JYP(박진영), 백지영의 ‘총 맞은 것처럼’을 만든 Hitman Bang(방시혁)도 멀게는 80년대, 가깝게는 2000년대에 닿는 발라드 시대에 씨를 뿌렸던 사람들이다. 발라드와 발라드 가사·작사가를 다룬 이 책이 BTS의 ‘봄날’, 태연의 ‘너를 그리는 시간’, 아이유의 ‘아이와 나의 바다’, 뉴진스의 ‘Ditto’, 세븐틴의 ‘먼지’를 포함하는 케이팝과 통할 수 있는(또는 케이팝을 통과하고 있는) 건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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