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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Oct 20. 2020

혐오와 차별을 향한 깊은 빡침

빌리 카터 [Don't Push Me]


미국 블루스/루츠록 밴드 라킨 포(Larkin Poe)처럼 비록 혈육은 아닐지언정 그에 버금가는 사이가 됐을(둘이면서 하나인 앨범 커버를 보라!) 빌리 카터가 결국 김지원(보컬), 김진아(기타)의 듀오가 됐다. 재편된 2인조로 낸 2집이 그렇다고 두 사람의 연주로만 채워진 것은 물론 아니다. 한때 김진아와 한 집에 살았던 공진(베이스)이 들어왔고 드러머 유연식도 리듬 신축을 위해 크루 멤버로 팀에 동참했다.


블루스와 로큰롤의 장점 또는 의미를 제대로 아는, 그러니까 그것들로 신나게 분노하거나 슬퍼할 줄 아는 이들은 자신들을 처음 들려준 ‘침묵’에서처럼 냉소와 비관 속에서 어떻게든 희망과 긍정의 불씨를 찾으려 했다. 그들은 진지했고 들떠 있었으며 성나고 또 거칠었다. 이들은 그렇게 컨트리와 펑크(Punk) 안에서 자신들만의 반골적 정서를 이끌어내는데 큰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Traffic’ 같은 잔잔한 어쿠스틱 포크에서도, ‘화장’같은 장엄한 프로그레시브 싸이키델릭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다.


그런 빌리 카터는 멀리서 바라만 보는 연민이 아닌 달려와 뛰어드는 연대를 강조하는 밴드다. 그리고 이번 두 번째 앨범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낸 데뷔작의 연장선에서 이제 우리들의 이야기를 해보자는 당당한 제안이다. 내 이야기, 내 경험, 내 목소리가 결국 우리의 이야기요 경험이자 목소리라는 전제가 이번 작품에는 깔려 있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음악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김지원이 창법과 어조를, 김진아가 기타 톤과 주법을 바꾸고 저음역의 필요를 절실히 깨달은 끝에 베이스를 불러들인 이유도 다 그런 ‘수단의 무장’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의 생각은 옳았다.



무장은 음악만 한 게 아니다. 서사를 책임질 텍스트에도 이들은 못지 않은 중무장을 가했는데 가령 ‘Don't Push Me To Love My Enemy’라는 제목에서만도 이들이 지금 얼마나 짜증이 나 있는지 우린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주변의 변화와 갈등 즉, “끝이 보이지 않는 혐오와 차별에 대한 깊은 빡침과 답답함”을 동력으로 “일정한 가치를 숭고하게 여기지 않으면 배척당하는 세상”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해 빌리 카터는 지난 수 년간 열심히 칼을 갈았고 이를 갈았다.


대략 이런 식이다. ‘My Body My Choice’는 지난 2018년 봄 밴드가 유럽 투어 때 찾은 아일랜드 코크 시내에서 진행된 임신중절법 찬반투표 현장에서 본 문구('TRUST WOMEN / OUR BODIES OUR CHOICE / VOTE YES’)에서 영감 받은 것이다. ‘I See You’는 이 앨범이 깨부수려는 전제였던 사회 구성원들간 혐오와 차별에 관한 곡이고, “친구들의 목숨을 앗아간 병든 사회가 바로 살인자”라고 강펀치를 날리는 ‘Dead Bodies’ 역시 이들 분노의 중요한 한 조각이다. ‘Fear’는 앞서 ’Don’t Push Me To Love My Enemy’와 ‘I See You’가 노래한, 절대적일 수 없는 절대가치와 꺼질 만 하면 다시 불붙는 혐오와 차별의 진상을 한 번 더 상기시키고, 끝 곡 ‘Leave Me Alone’은 끝도 없이 남 일에 관심을 쏟는 ‘오지라퍼’들에게 날리는 빌리 카터의 자비 없는 니킥이다. 그나마 앨범 가운데 잠복해있는 ‘We All High’가 그래도, 그럼에도 자존감을 잃지 말자는 밴드의 실낱 같은, 그러나 충분히 가능한 희망의 부지깽이로 기능 한다.


이런 절실한 메시지를 업은 호쾌한 록 사운드는 곡들이 흐르는 내내 기복없이 자맥질 한다. 펑크와 개러지/하드록에 방점을 찍은 그 거친 소리의 자학은 주다스 프리스트(’Invisible Monster’)나 악틱 몽키스(‘Beat Up’), 갱 오브 포(‘I See You’)를 동시다발로 토해내며 바짝 독이 오른 기타 리프에 날렵한 스타카토 댄스 비트를 천천히, 그러나 집요하게 먹인다. 그것은 썩어문드러진 줄만 알았던 섹스 피스톨스식 분노의 기묘한 부활인 동시에 엘세븐(L7)과 홀(Hole)이 흘리고 간 녹슨 냉소의 파괴적 변주다.


예술비평가 수전 손택은 “모든 역사와 마찬가지로 모든 정치는 구체적인 것”이라고 썼다. 빌리 카터는 구체적이다. 그들은 지금 구체적인 사회 현상에 구체적으로 화가 나 있다. 일상에 만연한 차별과 혐오, 폭력, 가치의 숭배, 정해진 역할극에 신물이 난 그들의 절규는 그래서 결국 우리의 신음일지 모른다. 이는 빌리 카터의 역사가 될 것이고 이 염세를 부채질 한 정치는 앞으로도 저들 음악의 제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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