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시즌이다. 당장 해외 팝 팬들에겐 노래 두 곡이 떠오를 법하다. 머라이어 캐리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 그리고 왬!의 ‘Last Christmas’. 이 글에선 조지 마이클이 자신의 친가 2층에서 1시간 만에 멜로디 스케치를 끝낸 후자를 다룰 예정이다. 이유는 며칠 전 영국 BBC 라디오 1의 ‘라이브 라운지’에서 로제가 이 곡을 커버했기 때문이다.
이날 로제는 목을 제대로 풀지 않은 채 부른 듯했다. 첫 박을 놓쳤고, 첫 발성 역시 중심을 잃은 듯 들렸다. 원곡의 말끔한 느낌을 아는 이들의 실망과 의아함이 뒤섞인 반응들이 SNS를 통해 잇따랐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일까. 프로도 사람인 이상, 라이브를 늘 잘할 순 없다. 세계적인 기타리스트도 손가락이 꼬일 수 있고, 날고 기는 드러머도 박자를 놓칠 수 있다. 이번 로제의 무대는 잘 부르고 못 부르고를 따지는 대신, 얼마나 프로답게 불렀느냐를 물어야 하는 경우였다. 노래를 놓고 음정과 발성 등 단순한 실력 평가가 불필요한 이유는, 프로라는 사실 자체로 로제의 가창력은 이미 검증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녀의 목 상태였다. 로제는 이날 목 컨디션이 정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질문은 ‘그럼에도 로제는 프로답게 불러냈는가’로 향해야 하는데, 나의 답은 ‘예스’다. 일단 로제는 '불렀'다. 만약 '오늘 목이 안 좋아 이 곡은 못 부르겠어요'라고 했다면 로제는 프로로서 자격을 의심받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불렀고, 과거 블랙 핑크 멤버들과 부를 때처럼 러닝 타임 절반 이상을 들어내지 않은 채 브리지까지 챙겨 거의 완주했다. 목 상태가 안 좋았는데도 말이다. 또한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 로제는 연주자 및 코러스 싱어들과 함께 음악을 즐기고 있음은 물론, 행복함을 전제한 표정 관리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목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무엇보다 그녀는 ‘블랙 핑크 출신 로제’의 음색으로 ‘Last Christmas’를 소화했다. 무릇 프로에게 훌륭한 리메이크란 원곡과 똑같이 부르는 게 아닌, 원곡을 자기 방식으로 소화해 내는 것. 빈틈없는 모방을 향한 노력은 아마추어들의 자세일 뿐, 프로에겐 이미 지겹도록 겪었을 과거일 터다. 그런 면에서 로제는 역시 프로였다.
걱정 마세요. 이건 왜마게돈(Whamageddon)에 포함되지 않으니까요. 우리가 확인했어요
유튜브에 올라온 로제의 커버 영상 아래엔 BBC 측에서 상단에 고정해 둔 위와 같은 댓글이 보인다. 설명이 좀 필요한데, 저들이 언급한 ‘왜마게돈’이란 참가자가 크리스마스 전 12월 1일부터 24일까지 ‘Last Christmas’를 듣지 않아야 한다는 룰을 가진 서바이벌 게임이다. 단, 원곡의 리믹스와 커버 버전은 들을 수 있다는 게 룰의 예외다. 그러니까 BBC의 말은 로제가 부른 건 왜마게돈 게임 룰을 거스르지 않는 ‘커버 버전’이므로 안심하고 감상하라는 얘기였다.
따로 사이트까지 구비한 왜마게돈의 존재는 그만큼 연말이 되면 전 세계인들이 ‘Last Christmas’를 찾고, 찾는 만큼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란 방증이다. 실제 이 노래는 40년 이상 매년 12월만 되면 백화점 같은 공공장소에 등장했으며, 크리스마스 시즌 라디오 방송국 재생 목록의 필수 곡으로도 대접받아 왔다. 지난해에도 이 노래는 세계 라디오 방송국들이 가장 많이 튼 캐럴 팝으로 기록됐다고 한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멜로디/비트와 달리 사랑의 배신을 다룬 가사를 지닌 이 희대의 곡은 조지 마이클 스스로 표현했듯 “크리스마스의 본질”에 가까운 노래로 팝 역사에 남아 있다.
영화 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세월을 타면서 낡아가는 영화가 있는 반면, 어떤 영화는 숙성된다”라고 말했다. ‘Last Christmas’는 저 말의 음악적 사례다. 또 이 곡은 쉽게 들리지만 부르기 어려운 대표적인 노래이기도 하다. 블루아이드 솔(blue-eyed soul)의 상징 같은 싱어송라이터가 남긴 불후의 명곡이다. 그런 노래를 로제가 4분 30초 동안 영국 라디오 공영 방송에서 불러낸 것이다. 목 상태가 좋지 않았음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