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디터리 Nov 01. 2022

회사와 이별하던 날

지금의 불행을 저 바다에 던져버려요


D 드라이브를 열었다. 그동안 진행했던 프로젝트 폴더들이 저마다 번호를 달고 차례대로 나열되어 있다. 이 회사에 와서 만들었던 시간 순이다. 언제부터 폴더에 숫자를 붙였을까. 기억나지 않는 어느 날엔가 그만두고 싶었던 그날부터였을 거다. 이 회사에서 앞으로 몇 권의 책을 만들고 다시 짐을 싸게 될까, 하는 예감에서.


일하는 동안 즐겁지 않은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서른 살에 들어온 이 회사에서 열심히 일할 수 있는 환경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일을 했다. 나도 모르게 많이 배웠고, 경험은 여유로 찾아왔다. 다만 늘 갑갑한 곳이 조직 생활이라지만 특히나 몰리는 업무는 서서히 억울함으로 쌓여갔다. 오래된 조직이 가진 고질적인 낡은 사고방식과 유연하지 못한 대처에 마음은 자꾸 무너졌다.


인수인계에 필요한 자료 외에 불필요한 자료들을 휴지통에 담는다. 선택되지 않았던 시안들, 카피들이 삭제된다. 나름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쏟아냈지만 이곳에서는 미처 펼쳐보지 못했던 기획안은 내 개인 메일로 보낸다. 용량을 표시하는 파란 막대가 줄어들수록 마음은 가벼워진다.


책상 위에 잔뜩 쌓여 있던 책들도 박스를 접어 그 안에 담는다. 참고도서였던 책, 출간 당시 화제였던 책, 다른 회사 동료가 보내준 책, 저자가 선물한 책 등등 한가득 쌓여 있던 책들이 차곡차곡 담긴다. 택배 송장에는 우리 집 주소를 적는다. 대여섯 개의 박스라니. 책상 주변이 정리되면서 공간이 여유롭다.


회사 앞 카페를 간다. 밝은 웃음으로 명랑한 사장님이 매일 아침 하루를 버틸 수퍼- 파워를 충전해주던 그곳. 매일 다르게 바뀌던 장난감을 궁금해하던 날들도 이제는 안녕. 가득 찬 쿠폰은 늘 웃는 얼굴로 나까지 기분 좋게 만들어줬던 다른 팀 선배에게 선물하기로 한다.


면접을 보고 설레며 첫 출근하던 날이 까마득하다. 고작 3년 반인데, 좋은 추억도 있는 반면, 1년 전부터는 많이 지쳤더랬다.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걱정스런 얼굴로 안부를 물었고, 아직은 괜찮아, 나 스스로를 토닥이며 입술을 깨물고 버텼다.


이제는 안녕하기로 한다. 무엇보다 누구보다 나 자신이 행복해야 한다고, 이제는 그럴 때가 되었다고, 그동안 오래 참았으니 됐다고. 그래서 안녕하기로 한다. 앞으로 더 안녕한 나를 만나기로 한다.


안녕, 안녕, 다시는 만나지 않기로 해요.


내 미래는 걱정하지 맙시다. 월급 안 받는 만큼 나는 자유롭고 행복할 테니. 당분간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늘어지게 잠을 자고, 먹고 싶을 때 식사를 하고, 집에 쌓아두기만 했던 책들도 야금야금 읽고, 충분히 긴 여행을 다녀오면서 굳은 어깨와 목과 아팠던 허리를 풀어줄 겁니다. 월급에 포함되어 있던 스트레스와 치사함, 억울함, 비위 맞춤, 말도 안 되던 부조리함과 답답하던 그 마음들도 다 사양할 테니 걱정 말아요.


권한은 없고 책임 질 일은 잔뜩이었던 날들, 모욕적인 말에도 제대로 대꾸하지 못해 자기 전에 이불 속에서 하이킥하던 밤들, 꿈속에서도 괴롭히던 사람들과 집에 와서 폭식으로 풀어 퉁퉁 불어버린 몸과도 안녕해야죠.


더 이상의 악몽은 없을, 나의 날들을 위해. 안녕!


(2015년 두 번째 회사를 퇴사하고 <PAPER>에 실었던 글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