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여행기 #13. 한국 사람이라 참 다행이야
페루에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쿠바 호스텔을 떠난지 꼬박 24시간만이었다. 택시로 5시간을 이동하고, 비행기로 10시간을 이동하고, 중간에 들른 콜롬비아의 보고타공항에서 쪽잠을 자며 밤을 지새웠다. 그렇게 우리는 페루의 수도 쿠스코에 무사히 도착했다.
숙소에 도착해 체크인을 하니 시계가 12시를 가르켰다. 비행기를 비롯한 모든 이동수단이 우리가 계획한 시간표대로 움직여준 덕분이다. 혹시나 비행기가 지연되면 어쩌나 걱정했던 불안감이 사라졌다. 도착하자 마자 코카차를 마시고 약국에 가서 고산병약을 샀다. 환전도, 약 구입도 모두 계획대로 돌아갔다. 어라 너무 계획대로 되는걸. 흐뭇했다.
쿠스코는 수도라 그런지 깔끔하게 정돈된 카페,레스토랑,상점이 많았다. 예상보다 밝고 청결한 골목과 상점 덕분에 막연히 갖고 있던 ‘남미대륙’에 대한 두려움이 금방 사라졌다. 와이파이가 되는 숙소 덕분일까? 다른 모든 게 잘 풀릴 것만 같은 자신감이 샘솟았다.
‘지금부터 남미 대륙 여행이 시작이다. 예감이 좋다.’
점심시간에 맞춰 도착한 우리는 체크인을 한 후 A의 태블릿PC로 식사장소를 골랐다. 미리 다운받은 지도 덕분에 의견 충돌 없이 빠르게 목적지를 정할 수 있었다. 곧장 레스토랑으로 간 우리는 아늑한 실내에 자리잡고 음식을 주문했다. 그때, 창밖 풍경위로 얼음조각 같은 것이 떨어졌다.
뚝- 뚝- 뚜두둑-
한 방울 두 방울 불길한 징조를 보이던 하늘은 순식간에 사나워졌다. 갑작스러웠다. 이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된다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모든게 우리 계획대로 돌아가는게 못마땅했던걸까. 비도 아닌, 눈도 아닌, 우박도 아닌 신기한 방울이 내렸다. (궃이 셋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우박에 가까웠다.)
뚝-두두둑- 뚜-두두두두두둑-뚣두두두두ㅜ두두ㅜ두두ㅜ두ㅜ둗둗두둗두두-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조금씩 떨어지던 우박비가 음식이 나올 때 즈음엔 무섭게 쏟아졌다. 우리는 음식이 나왔는데도 한 동안 창 밖을 보며 와 하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모두 ‘이 날씨 계속되면 어쪄지?’하고 우려하는 눈빛이었다. 사나워진 빗방울에 지나가던 사람들도 모두 가던 길을 멈추고 건물 주변으로 피해서 하늘이 잦아들길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일기예보에 우박 이야기가 있었던가요?”
“없었던 것 같은데….”
“와- 진짜 많이 내리네요. 쏘..소나기겠죠?”
“우리 내일 성스러운 계곡 투어 갈 수 있겠죠?”
성스러운 계곡 투어는 마추픽추로 가는 길에 쿠스코 주변의 유적지들을 군데군데 둘러볼 수 있는 여행패키지다. 현지 여행사를 이용하면 택시기사 아저씨가 성스러운 계곡 투어에 포함된 유적지를 순서대로 들른 후 기차역까지 바래다주었다. 대부분의 마추픽추 여행객들은 쿠스코에서 이 성스러운 계곡 투어를 한 후 마추픽추로 이동한다. 우린 한국에서부터 미리 투어사에 연락해 다음날 날짜로 예약을 해둔 상태였다. 굵어지는 빗소리와 함께 불안감이 고조됐다.
“흠.. 어떻게해야하지? 내일 날씨를 찾아보면 비온다고 되어있긴 한데요… 투어를 취소하지 않아도 될까요?”
우리 셋 중 어느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이곳의 일기예보가 얼마나 맞는지, 날씨가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그런건 찾아보기 힘들었다. 인터넷에 검색해도 잘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만 보였다.
“아 맞다. 단체채팅방. 거기에 물어볼까요?”
남미를 여행하고 있는 한국인 여행자들이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게 열려있는 채팅방이었다. 사람들이 동행을 구하기도 하고 여행 정보를 물어보기도 하는 곳이라 제법 유용하단 소문을 듣고 ‘세상이 참 좋아졌다’생각하며 출발 전에 미리 참여해두었던 곳이다.
페루 여행자들의 단체채팅방에 메시지를 보내보았다. ‘내일 예약한 투어를 취소해야할까요?’라고. 혹시 현지 날씨를 잘 아는 사람이나 비가올 때 투어를 했던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의견을 구하고 기다렸다.
‘카톡-’
고맙게도 금방 메시지가 도착했다. 쿠스코에 있는 한식당을 운영하시는 사장님이었다.
“웬만한 날씨에는 항상 출발해요. 쿠스코에 이런 우박이 오는건 저도 참 오랜만에 보네요.”
따뜻하고 든든한 기운이 샘솟았다. 한국어로 도착한 메시지. 그 몇자 안 되는 글자에 우리는 긍정적인 생각을 조금 되찾았다. 편안해진 기분. 덕분에 우린 우려를 접어두고 점심식사를 즐겼다. 그리고, 그날 저녁식사는 메뉴는 한국음식으로 정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바깥공기의 차가움때문에 뜨뜻한 국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안그래도 한국음식이 필요했다며 모두 동의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올 때 까지 성난 하늘은 멈추지 않았지만, 다행히 굵은 우박은 좀 잦아들어 있었다. 거의 액체에 가까운 비가 내리고 있었고, 길가에 쌓인 우박은 서걱서걱한 샤베트처럼 녹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급한대로 우비를 구매해서 입고 돌아왔다. 광장 옆 카페에서 티타임도 갖고 거나하게 한식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니, 춥지고 않고 외롭지도 않고 불안하지도 않았다.
페루에서의 첫번째 하루. 그 하루 사이 변화무쌍했던 날씨를 통해 깨달은 점이 있다면, 한국말로 주고받는 몇 마디 안되는 문자메시지가 1억원 여행자보험보다 안도감을 준다는 것이다.
잠들기 전, 감사할 많은 것들이 생각났다. 한글을 만들어주신 세종대왕님께도 감사했고, 스마트폰을 만들어준 스티브잡스에게도, 오픈채팅방을 만들어준 카카오톡팀에게도, 남미여행자들의 단체 채팅방을 개설해주신 남미여행 카페 운영진에게도, 따뜻하게 답장을 보내주신 한인민박 사장님께도 감사했다. 지구 반대편으로 왔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지금 여기에도 한국 사람들이 숨쉬고 살고 있다는 사실. 그걸 확인시켜 준 그들 덕분에 안도하며 누울 수 있었으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