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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라 Oct 29. 2023

낭만 물류 센터

1. 현장 속으로

 나는 길을 잃었다.

나의 시도들은 실패했고 더 이상 나에게 답은 없어 보였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느껴졌다. 나는 이제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다.

나의 천직이라고 느꼈던 나의 일은 수많은 이직과 10년의 시간 뒤에 나에게 최종적으로 커리어의 끝을 선언했다.


한 달을 죽은 사람처럼 잠만 잤다. 그러다 한 달이 지날 때쯤,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이대로 모든 걸 포기하고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친한 친구가 아르바이트 겸 물류센터를 가보라고 했다. 나는 마지막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물류센터 일을 신청했다.


새벽 5시 반. 캄캄하고 차가운 새벽 공기 속을 걸어가며 낯설음과 두려움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정해진 정거장에는 이미 몇몇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잠시 후 셔틀버스가 왔고 나는 버스에 타 좌석에 앉아 눈을 감았다. 아 이제 이 버스를 탔으니 난 도중에 그만둘 수도, 나갈 수도 없겠구나. 얼마나 힘들지 모르지만 오늘 하루를 어떻게든 버텨보자. 이런 생각을 했다. 차 안에 흐르던 음악과 공기, 사람들의 잠, 그 첫날의 분위기가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버스에서 잠을 청하며 눈을 감았다.


사람들은 은근히 물류센터에 대한 편견이 있다. 못 배운 사람들이 가는 곳, 사업 실패하거나 빚 진 사람들이 가는 곳, 한심한 사람들이 가는 곳, 적어도 내 가족은 그런데 안 간다는 둥.....

나 또한 한심하게도 처음에 그곳에 들어설 때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우울했다. 내가 이제 이런 곳까지 떨어졌구나 라는 자괴감으로 가득했었다.


1시간쯤 지났을까, 버스는 낯선 어둠 속 어딘가 나를 데려다 놓았다. 김서린 창밖으로 드문드문 보이는 공장 같은 물류센터의 모습이 기억난다. 문이 열리고 잠에서 깬 사람들과 함께 버스에서 내리니 차가운 새벽 공기가 뺨에 닿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그저 사람들이 향하는 곳을 향해 따라갔다.


나는 그곳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마음을 되찾았다.


이곳 사람들이 서로 간의 보이지 않는 경쟁과 험담, 피상적인 인맥 관리, 사내 정치, 성과 가로채기, 눈치 싸움에 찌든 물류센터 바깥세상의 인간들보다 훨씬 인간적이다. 어차피 많은 새로운 사람들이 매일 들락거리므로 이들은 적어도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도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이들은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를 할 줄 안다.

이곳에서는 원한다면 솔로 플레이(혼자 다니고 지내고 일하는 것)가능하다. 여기서는 혼자가 될 자유가 인정된다. 그것이 이상하게 비치지도 않는다. 사실 본래 인간은 원래 혼자인데 그것에 의식적으로 배반하려는 억지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 조직 생활이라는 이름의 억압을 경험하지 않아도 생존하려는 개인적 노력이 암묵적으로 인정되는 곳이다. 물론 원한다면 원하는 친한 사람, 마음 맞는 사람들과 다닐 자유도 있다.


잘 다져진 토대에서 무언가 시작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무너진 집을 바라보고 실패를 인정하고, 그 잔해를 치워 새 토대를 세우고 일을 시작하는 것은 사실 굉장한 자기 수용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나는 이곳에서 그러한 용기를 실천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여기서 사람들은 웬만큼 친해지기 전까지 서로의 과거를 묻지 않는다. 이전 직장, 학력 이런 과거들은 여기서 무의미하다. 그 과거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사람들은 현재에 집중한다. 육체노동은 사람을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일에 진정으로 열중하고(그래야만 사실 시간이 빨리 간다.)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며 간단한 농담을 나눈다.

지금 이 순간 그것이면 여기서는 충분하다.


일은 힘들다. 힘들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사회의 편견처럼 한심한 인간들이 절대 아니었다.

그들은 재기를 위해 노력하는 사업가,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노동자, 불가피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차게 살아가는 사람들, 자신의 결과에 책임을 지고자 하는 개척자, 세상의 불합리한 기준을 떠나 자신의 삶의 기둥을 세우는 장년, 꿈을 향해 주경야독하며 땀 흘리는 청년,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몸을 던지는 아버지, 자식의 미래를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 그리고 그곳에서 새 삶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정말 한심한 인간들은 그곳에 없다. 그런 이들은 이전의 나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누워 있거나, 이미 세상을 스스로 떠났다.


이들은 삶의 고통을 용감하게 몸으로 부딪혀 살아내고자 하는 강인하고 건강한 사람들이다.

나는 이제 이곳에서 내가 경험한 일들과 이곳에서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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