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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Apr 13. 2024

피 묻은 티를 입고

85% 내향, 91% 직관, 63% 감정, 92% 탐색


학생들이 그랬나? 나에게 T라든가 J를 떠올리는 사람이 있었다.

가 한 선배가 자신의 논문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내놓은 답을 듣더니 너는 은근히 공대 성격이 있는 것 같다고 했었다. 아마, 시를 읽고 추상적이고 감각적이고 감정적인 주제를 떠올리고, 이를 개념적으로 분석하려는 선배에게 내놓은 나의 대답이 이른바 '칼답'이었던 모양이다.

최근에는 한 선생님이 나에게 촌철살인을 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농담으로 하는 말인데, 그 말이 농담으로만 들리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뼈 있는 농담이었을까? 나는 단지 상대방이 했던 말을 이용해서 농담으로 되돌려 준 것이었는데, 그게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촌철살인으로 보이기도 했나 보다.


어쨌든 나는 시를 전공했고, 시를 쓰고, 글을 쓰고, 논문도 쓰는 사람이다. 대학원에 입학하여서는 시 같은 건 쓰지도 말라는 충고를 들었지만, 학위를 받고 나서는 다시 시를 포함한 관념적인 글들을 제법 쓴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관념적인 글이라는 게 대학원 전과 후로 완전히 달라진 것 같기는 하다. 그전까지는 정말 감정과 공상으로 가득했던 글이, 논문 쓰기를 배우고 제법 익숙하게 되면서는 감정과 공상도 근거를 제시하면서 늘어놓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내 나름이지만.

별 걱정 없이 대안을 내놓고, 할 수 있다고 이래이래 하면 된다고 말하는 내가 F보다는 T로 보이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P보다는 J처럼 보이기도 하는지 나의 MBTI를 맞춰보겠다며 호기롭게 J를 외친 조교가 있었다.

하기는 바깥일을 할 때면 쾌활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우중충하고 우울한 이중성을 보이니까.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질책을 할 때는 그리 신랄하지 못하다는 아내의 지적이야말로 나를 꿰뚫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다 그렇지 않을까? 객관적으로 판단해서 계획을 내놓는다고 해서, 아무 불안도 없이 갈팡질팡하지 않고 밀고 나갈 수 있을까? 제 아무리 이성적이고 계획적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정말 아무렇지 않게 지적질을 해대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어쩌면 나는 피(P) 묻은 티(T)를 입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단정하지 않은, 말 그대로 단정할 수 없는 티(T)를 걸치고 사람들 앞에 서는 나. 나의 칼답이나 촌철살인(T)은 피(P)가 잔뜩 묻어 있다. 그러니 이일 저일,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잘 헤쳐나가는 게 아닐까 싶다. 다만, 그 어지러움이 너무 빨리빨리 지나가서 눈치채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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