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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Jun 08. 2024

재떨이가 사라진 자동차

재떨이가 있을 때나 재떨이가 없는 지금이나 담배 연기와 담뱃재는 바깥으로 버려진다.


요즘 사람이 들으면 경악할지도 모르지만, 예전에는 버스에 재떨이가 있었다. 아마 시내버스에는 없었던 것 같고(있었나?), 좌석버스에는 앞 좌석 뒷면에 붙은 손잡이 옆에 재떨이도 함께 붙어 있었다. 어릴 적에 그 재떨이가 신기해서 열고 닫으면서 놀았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부모님은 더러운 것이라며 손을 대지 말라고 하셨다. 그래도 계속 만지고는 했다.


자동차에도 라이터와 재떨이가 있었다. 지금 타는 자동차에는 재떨이가 없지만, 예전에 탔던 2010년형 아반떼에만 해도 재떨이가 있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나는 동전 담는 통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재떨이에 정말 담뱃재를 떨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짐작건대 아무도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편의점을 장식하는 알록달록한 담배들은 애연가를 유혹하면서도 폐암, 구강암과 같은 끔찍한 사진과 경고 문구를 함께 보여주는 모순적인 존재다. 그럼에도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전자담배가 보급된 것도 있겠지만, 연초를 태우는 사람도 여전히 많다.


고백건대, 담배 자체를 혐오하지는 않는다. 영화에서 모자이크 처리 되는 담배가 못마땅하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옛 소설에서 묘사되는 담배 피우는 장면을 사랑했다. 실제로 담배를 태우는 사람과도 수다를 떤다. 담배 친구가 되어 주기도 한다. 단순히 상사이거나 선배여서가 아니다. 흡연하는 학생들과도 한 자리에 있는다. 담배가 싫다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까지 혐오하며 피한다면, 필요한 대화를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담배 연기가 싫으면 호흡을 조절하면 된다. 커피 한 잔이랑.


내가 아는 어떤 분은 담배 한 대를 꺼내 피우고 나서, 꽁초는 다시 제자리에 넣는다. 그리고 옆에 있는 새 담배를 꺼내 물고 다 피우고 나면 다시 제자리에 넣는다. 그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한 건 담배꽁초를 아무렇지 않게 내던지는 사람들을 많이 본 탓인지도 모른다.


내가 혐오하는 사람은 흡연자가 아니라, 멋지지 않은 흡연자일 뿐이다. 적어도 학내에서 목격하는 흡연 풍경은 썩 아름답지 못하다. 땅에는 담배꽁초가 흩뿌려져 있고, 미처 마르지 않은 가래침도 한 가득이다. 그 처참한 현장을 청소하는 분은, 누군가의 어머님들이다. 그 사실이 가장 안타깝다. 그럼에도 담배조차 피우지 않는 내가 그들에게 흡연 예절 운운하면 결국, 담배 혐오자의 꼰대짓이 되고 말 터이다. 결국, 흡연자 스스로 의식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버스에서 재떨이가 사라진 것은 환기가 잘 되지 않는 버스에서 담배를 피우는 행위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 행위보다 더 해롭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흡연자와 비흡연자(혹은 혐연자)가 함께 누리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버스 기사조차도 담배를 피울 수 없다. 자가용 자동차는 좀 다르다. 그것은 나의 소유이고 담배를 피우기로 선택했다면 그것은 사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공적 공간인 거리에 재를 떨거나 꽁초를 집어던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담배는 기호품이다. 누군가의 기호에 맞는다면, 다른 누군가의 기호에는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내 기호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금지해 달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 사회는 모든 사람의 기호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런 사회니까 말이다. 그러나 길거리에 담배꽁초를 버리거나, 차창 밖으로 담뱃재를 떠는 행위는 기호의 문제가 아니다. 길거리에 쓰레기 버리기를 기호로 인정하고 그런 행위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회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사회적 약속을 어기는 행위이기 때문에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다.


남녀노소, 담배 형태를 불문하고 공적공간을 사적으로 점유하는 흡연은 환영받기 힘들다. 바닥에 꽁초를 버리고, 침을 뱉는 것은 조용히 뱉든 요란하게 뱉든 모두 잘못된 행위이다. 이런 사실을 2024년에도  언급해야 하는 사실이 안타깝다.


자동차에서 재떨이가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자동차 실내에 재떨이가 무용지물이라는 소비자의 반응이 있어서가 아닐까. 내가 소유한 자동차는 멋지고 깨끗해야 한다는 마음이 더러운 것은 바깥으로 내던지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러나 도로와 길거리는 자기 집(사유지/사적 공간)이 아니라 공공장소이다. 모두가 주인이다. 모두가 주인인데, 마치 나만 주인인 것처럼 점유해서는 안 된다. 그건 기본적인 사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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