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로주의'든 '등정주의'든 결국 정상에 오르는 것만 생각한다는 건 똑같아 보인다. 갈팡질팡 우왕좌왕하면서도 정상에 오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나, 정해진 최선의 길로 다른 사람보다 빨리 정상에 오르겠다고 결심한 사람이나 모두 '정상'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상[頂上]'에 오르지 않으면 비정상[非正常]으로 취급받는 세상이다. 아니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다. 누구나 자신만의 정상이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 정상은 다른 평균적인 정상이나 최정상과 비교된다. 그러한 비교는 결국 각각의 능력 차이에 의한 결과라고 느끼게 만든다.
많은 사람이 차이가 나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차별하는 말을 한다. 차이가 나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면 차이에 집중해 줘야 할 텐데도, 차이가 나쁜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이 가장 먼저 그 차이를 무시하고 차별주의자로 둔갑하기도 한다.
공부를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은 유전자 때문이라고 말하고, 운동을 잘하고 못하는 것도 유전자 때문이라고 말하는 방송을 본 기억이 있다. 공격적인 사람과 온화한 사람도 결국 유전자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차이가 한 세기 전 세계를 지배했던 우월주의와 차별주의의 또 다른 모습(버전)처럼 보이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차별을 없애자고 말하는 그들은 이미 알고 있다. 차별을 없애자고 말하면 차별을 없애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과 찬성하는 사람 사이에 차별이 발생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러한 차별을 딛고서야 자신의 입지를 더 굳힐 수 있다는 것을. 차별을 없애자고 말하는 그들은 사실 자신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차별을 없애자고 말하는 그들은 자신의 자리를 그들 스스로 차별해 왔던 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그럴 생각이 없는 자들이 주장하는 차별금지는 그야말로 허언에 불과하다. 스스로의 자리를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성역으로 간직한 채, 나머지 사람들을 차별과 혐오, 분노와 증오로 맞서게 만드니까 말이다.
등로주의와 등정주의를 이해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모호함에 붙들리고 말았다. '등[登]'이라는 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만 오르고 싶다. 그저 같은 길을 가고 싶을 뿐이다. 태어나서 죽음으로 이르는 똑같은 길을 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받고 싶을 뿐이다.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평등이 아닐까.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차별금지가 아닐까. 무차별을 향한 무차별적인 포용이 아니라, 탈차별을 통한 차이로의 복귀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 더는 오르지 않는 삶. 죽음을 향한 길을 서로 지긋이 바라보며 격려해 주는 삶. 등로[等路]주의. 그 길 위에선 빨리 가고 느리게 가고의 문제가 더는 의미 없을 것이다. 진정으로 평등한 길이다.
*물론, 等이라는 한자에는 순위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1등, 2등, 3등을 나누는 그 等이다. 그러나 등은 같음도 의미한다. 무리 지어 있음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1등은 그저 처음의 것일 뿐이다. 2등은 두 번째의 것일 뿐이다. 여기에는 처음의 것이 그것 다음의 것보다 낫다거나, 두 번째의 것이 처음의 것보다 못하다는 가치 평가가 들어가지 않는다. 1등이 2등보다 낫다는 표현이 차별을 만든다. 1등과 2등 자체는 차별이 아닌 차이일 뿐이다. 각각의 고유한 자리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