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이 아닐 수 있다. 다른 사람의 기준(아름)에서도 납득할 수 있는 개성을 뽐냈을 때, 비로소 많은 사람이 인정하는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다운 사람'으로 살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모두가 자신만의 개성을 뽐내며 살아가면 된다고 말할 때, '무한히 많은 개성'은 결국, 아름다운 개성이 없음과 같을 듯하다. 어떤 사람의 '개성(아름다움)'이 많은 사람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아름답지 않은 상태에 관한 합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는 나다움이란, '개성'과 '가능성' 사이에서 찾는 균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를 향한 몰입으로 나만의 세상(개성)을 만들되, 그것이 나만의 세상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반드시 물어볼 것 같다. "그럼 아름다운 나의 모습은 결국 다른 사람의 허락을 받은 상태여야 하느냐"라고.
많은 철학자가 '나'의 정체를 탐구할 때 반드시 언급한 것은 '타자'이다.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관계를 맺는다. 아니, 이미 태아일 때부터 관계를 맺는다. 연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라는 존재를 생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심지어 '나'를 구성하는 모든 세포들조차도 하나의 거대한 관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짜 단 하나의 나를 상상하겠다는 시도 자체가 이미 무모한 것이 아닐까.
잘 살고 못 살고, 멋진 삶을 살고 멋지지 않은 삶을 살고는 결국 '개성'과 '가능성' 사이에 머물 수 있느냐 없느냐인지도 모른다. '개성'을 잃고 '가능성'만을 지향할 때에도 삶은 실패하며, '가능성'을 닫고 '개성'에만 몰입하는 때에도 삶은 실패할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관계)로 '가능성'을 열되, 개성이라는 방 안으로 돌아와 나('나'와 '나'의 관계)를 재정비할 시간을 갖는 일. 그것만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나'를 완성하는 길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