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다’는 ‘나답다’에서 왔다고 한다.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나다움’을 쉽게 말할 수 없던 중세를 떠올리면, 그 말이 지닌 무게가 만만하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천민은 말할 것도 없고 평민조차도 언감생심 나다운 생각이나 감정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었겠는가.
즐겨 인용하는 한병철의 《아름다움의 구원》은 결국 ‘나다움’을 구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한병철은 그 책에서, 주체가 지닌 이성의 힘으로 타자의 숭고함을 내면화함으로써 얻어낸 결괏값이야말로 ‘아름다움’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근대적 의미의 주체가 자아정체성을 확립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데카르트의 ‘생각나는 나’와 칸트의 ‘입법하는 주체’가 ‘아름다움’을 생성할 자격을 지닌다.
그런데 이러한 주체는 ‘이 세상에는 오직 나뿐’이라는 독아론(獨我惀)에 빠질 위험을 내재하고 있어 현대 철학에서 비판의 대상이기도 했다. 니체가 종교와 도덕규범을 비판하고,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따르는 철학자들이 주체의 이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아름다운(생각하는 판단하는) 주체를 향한 비판적 성격을 지닌다.
대중을 위한 콘텐츠에서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목격되는 것 같다. 하나는 나를 무너뜨리고 타인을 온전히 받아들이라는 선각자적 주문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나답게 너는 너답게’ 살아가면 된다는 상대주의적 관점이다. 이 두 가지는 각각 ‘큰 자아’와 ‘작은 자아’ 모두를 향한 비판을 보이고 있다.
전자는 내가 형성한 기존 관점을 완전히 타파하지 않으면 타자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에는 어폐가 있다. 이미 이해(理解)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순간 주체의 인식이 작용함을 상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이나, 이해는 없고 오직 오해뿐이라는 법정 스님의 말은 인간만의 특별한 능력으로서 이성적 사고가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누군가 상대방을 완전히(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자신을 넘어서는 것은 힘든 일이다. 이해 자체는 어떤 식으로는 특정한 기준으로 그 대상을 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넘어서는 것은 기준 자체의 ‘무(無)’를 실현하는 것이어야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진정한 타자는 죽음이라고 했다(《시간과 타자》). 그것은 사실이기도 하고, 철학적 표현이기도 하다. 죽음을 마주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없다. 기억할 수 없고, 되돌아와 이야기할 수 없다. 타자는 온전히 경험하는 순간 주체의 죽음을 불러오는 위험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타자를 이해하려는 시도, 타자를 만나려는 시도는 나의 죽음을 전제하거나 적어도 죽음에 가까운 상태를 용인할 용기가 필요하다.
영화 <루시>에서 루시는 사라져버린 자신을 찾는 형사에게 자신은 어디에나 존재한다고 말한다. 루시는 100% 자신을 살아낼 수 있게 되었을 때 사라졌다. 세포를 통제하여 유기체를 유지하는 대신, 세포 하나하나가 자유롭게 사진의 생명을 영위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라졌고, 이 세상 모든 것에 융화되었다. 자아는 그런 것이다. 내가 믿는 것만큼만 나로 받아들여진다. 내가 상상할 수 있고,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이 바로 ‘나 자신’이다. 나와 다른 육신과 그 육신에 내재한 정신을 받아들이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루시처럼 자신의 유기체를 포기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타자를 온전히 경험할 수 없고, 그저 겉모습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타자는 이해할 수 없으며 그저 마주하는 것이다. 그 마주함에서 내가 느낀 ‘감정’이 내가 아는 타자의 전부이며, 그러한 감정이 결국 타자의 속성을 판단(규정)한다. 불교에서 타인의 화에 반응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 타인을 그저 바라보고 있으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의 화(심지어 모든 감정)는 그의 마음에 비친 나의 모습에 관한 표현일 뿐, 타자인 나를 온전히 느끼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우리는 후자의 방식 즉, ‘나는 나고 너는 너’라는 상대주의적 관점을 취하게 된다. 이 쉬운 방법은 혈액형이나 별자리, MBTI라는 가면을 쓰고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나’와 ‘너’는 다르므로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고, 다름이 불편하면 알아서 거르면 된다는 생각까지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심지어 나는 그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의 증거’를 바탕으로 ‘그의 다름’을 존중하는 것이라는 변명까지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다름을 존중하는 것과 다름을 회피하는 것은 다르기에 ‘타인다움(그의 입장에는 ‘나다움’)’을 외면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사람, 서로 다른 가치관을 지닌 사람이 서로를 향한 존중을 핑계로 마주하기를 거부할 때, 그것은 상대방의 ‘나다움’을 향한 멸시에 가까워질 위험이 있다.
그렇지만 후자의 태도를 쉽게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매끄러움을 강조(강요)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불편한 상황에서도 불편한 티 내지 않고, 언제나 긍정 에너지를 ‘뿜뿜’해야만 이 시대에 어울린다는 ‘빅 브라더’의 목소리에 우리는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이러한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방법은 앞서 말한 것처럼, 나와 그 사람이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이며, 할 수만 있다면 외면하는 것이다.
한병철은 이런 부분을 비판하고 있다. 긍정성 과잉의 시대, 매끄러운 사회 속에서 주체는 자신의 방향을 스스로 설정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무한히 긍정하(고 있다고 믿으)면서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있다고 믿으)면서 힘차게(그렇게 믿으며) 앞을 향해 전진하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이해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생각은 ‘나다움(아름다움)’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나다움(아름다움)’을 죽이는 것이다. 세상은 오직 ‘성공’이라는 골인 지점만 화려하게 꾸며놓고 이곳만 바라보며 달리라고 말한다. “당신의 주변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뿐이다. 그러니 그것들을 바라보며 스트레스받지 마라. 차라리 너 자신에게 집중하면서 너의 걸음걸이 너의 체력 네가 나아간 거리만을 생각하며 계속 달려라.”
한병철은 아름다움을 구원해야 한다고 했다. 이 아름다움이,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으로 무장한, 자칫 독아론에 빠질지도 모를 근대적 주체라고 할지라도, 현시대에는 애초에 그러한 주체가 없으니 살려내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 앞에 있는 타자를 온전히 받아들이겠다고 주장하면서 사실은 타자를 향한 초점을 흐려버리는 위장술을 거두고, 차라리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말이다. 그러한 시도는 분명 폭력적일 수밖에 없지만, 내가 이해한 것을 타인에게 강요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우리에게는 없지 않은가. 내가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라기보다, 내가 이 세상을 헤쳐나갈 힘을 얻기 위해서 나는 아름다워(나다워)져야 하는지도 모른다. 나만의 방식으로 포장하고 저장한 타자들의 데이터를 가지고서야 세상이라는 험한 길을 뚜벅뚜벅 나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한병철의 책에 담긴 진심을 어리석은 내가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도 나에게는 타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나만의 아름다움을 추구할 뿐이다. 그것이 적어도 그의 책을 읽은 내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존중이기 때문이겠다.
물론,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내가 단단한 바위가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또한 경계해야 한다. 내가 너무 물러져서 물처럼 흘러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단단하지도 않고 물처럼 유연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기. 때로는 단단한 벽을 세워 나를 지키더라도 때로는 물처럼 타자를 담뿍 안아 들일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함을 잊지 않아야 한다. 아니다. 엉성하게 쌓아 올린 옛 초가집의 돌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르겠다. 경계를 나타내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그 담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