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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Nov 17. 2023

싱클레어 혹은 데미안에게

소설 『데미안』의 주인공은 싱클레어일까, 데미안일까.

나의 독법에서 싱클레어는 질서 데미안은 무질서, 싱클레어는 안(內) 데미안은 밖(外)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바깥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도왔거나 나오기를 희망했는지도 모른다.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모든 인간은 자신을 모른다.

견고한 성벽을 쌓고 그 세계를 온전히 지키면서 살아가려고 하지만, 그 성벽이 온전한 자아의 경계인지도 불분명하고 따라서 변형되거나 파괴될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성벽은 언제나 타자의 공격 때문에 의미를 얻는다.

타자의 공격이 존재하기에 나를 지키는 성벽이 존재한다. 때로는 무너뜨리지 않고 성벽을 타고 넘어와 마음대로 나의 자아를 엉망진창으로 헤집고 다니는 타자도 있다.

그 타자는 내가 한 번도 목격하지 못했던 ‘또 다른 나’일 수도 있고, 내가 아닌 다른 인격체의 자아일 수도 있다. 전자는 ‘사춘기’에서 경험할 수 있는 사건일 것이고, 후자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경험할 수 있는 사건일 것이다.     


싱클레어의 ‘거짓말’은 숨겨진 욕망의 표출이다.

신실한 종교적 가치관을 가지고 따르는 완전하고 평화로운 질서 속에서 성장한 싱클레어의 마음은 사실상 일탈하려는 욕망을 억누른 상태라고들 한다.

싱클레어의 거짓말은 현상 자체를 두고 봤을 때는 잘못된 정보를 전달한 것이지만, 그의 마음이 향하는 바로는 진실인 것이다.      


니체가 ‘도덕’을 부정하고 ‘신’의 죽음을 외친 것도 질서가 주체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도덕과 신은 인간의 욕망을 억누르며 억눌린 욕망은 삶을 허무하게 만든다.

생활계획표에 따라서 진행되는 삶은 오히려 무기력할 수밖에 없고, 침범해 들어오는 ‘타자’와 그로 인한 사건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든다. 그것을 철저히 무시하거나 제거해야만 재빨리 설정된 계획표에 따르는 삶으로 돌아올 수 있고, 그래야만 자신이 믿고 따르는 도덕에 부합한 삶을 살 수 있으니 말이다.      


니체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니체는 무질서를 조장하고, 신성한 가치를 모독한 철학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은 질서정연하지 않다. 우주의 질서, 만물의 질서가 존재하지만, 그것이 수학적인 공식이나 과학적인 발견으로 증명되기도 하지만, 그 질서는 인간이 부여한 지적 산물에 불과하다(대부분은 발견했다고 말하겠지만). 우주의 질서는 하나뿐이다. 생성과 소멸의 무한한 반복.      


니체는 구원의 약속이 생의 소멸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며, 소멸하지 않는 삶은 허무할 수밖에 없음을 지적했다. 더 정확히는 현실 종교가 약속한 영원한 삶으로의 구원이 유한한 지상의 삶을 등한시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카르페 디엠’과 ‘메멘토 모리’를 나란히 곁에 두어야만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한 선배의 말처럼, 우리의 삶은 소멸을 받아들일 때 진정한 가치를 얻을 수 있다. 지금 당장 죽을 수 있으며, 그것으로 완전히 끝이라는 생각을 일상에 받아들일 때, 매 순간 열정적이고 행복할 수 있다고 말이다.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집안의 질서, 신의 이름으로 세상에 내려온 질서, 도덕과 법률, 0과 1로 이루어지는 정교하고 정확한 세상. 이 모든 것은 ‘나’의 모습을 하나로 규정함으로써 ‘나 자신이’ 소멸할 가능성을 제거한다. 그로 인해 나 자신이 생성될 가능성도 제거한다. 손톱을 깎아야 건강한 조직이 새로 자라고, 머리카락을 잘라야 모발이 더욱 튼튼해지는 것처럼. 나 자신은 매일 죽어야 매일 새로 태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 세상은 데미안을 긍정하지 않는다. 형제(부정할 수 없는 질서)를 죽인 카인을 특별한 힘을 지녔던 존재였다고 평가하는 데미안을 세상은 용납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싱클레어다. 질서에 순응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담론을 수용하고 그에 맞는 삶의 계획을 다시 수립하면서 살아가는, 그래서 내 마음속에 움트고 있는 아직 부화하지 못한 새를 애써 위로하면서 살아가는, 싱클레어.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결석하지 않고 매 수업 열심히, 모든 과제를 수행했지만 중간 기말시험에서 0점을 받았다는 이유로 F를 받는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공대생과 자신에게 고백한 사내와의 관계를 명확하게 규정하지 못하여 어지러움을 느끼는 인문대생과 관계에 관한 명확성은 관계 맺음을 시작하면서 풀어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인문대생 사이에서,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만남을 본다.     


‘카르페 디엠’과 ‘메멘토 모리’, ‘싱클레어’와 ‘데미안’, 그리고 ‘니체’.

우리 삶은 얼마나 초라한가. 그 초라함은 정교한 세상의 질서에 나를 빗대는 순간 초래함을 의심해 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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