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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aMya Sep 05. 2022

봉숭아 물

7월에 들인 봉숭아 물이 어느새 손톱 위 반쪽만 남았다. 한국에 다녀온 지 벌써 한 달이 지났구나.

귀농하시고 처음 가는 친정집 거실에서 엄마가 봉숭아에 백반을 섞어 꽁꽁 찧었다.

"봉숭아 물들이려고, 너도 오랜만이지? 나도 그동안 통 못했어."

나더러 같이 봉숭아 물들이자고 권한 것도 아니고, 내가 봉숭아 물을 들이고 싶은지 의사를 확인하지도 않았는데, 엄마는 뭔가 당연하고 오래된 약속을 이행하는 사람처럼 봉숭아를 찧고, 실을 자르고 랩을 오렸다.

5년 만에 만난 엄마는 다행히 예상한 정도만큼만 늙었다. 왜 귀농을 해서, 서울에 친정을 없앴느냐고 불평은 했지만, 막상 작은 땅을 경작하며,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켜가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봉숭아 물든 손톱보다 더 벌겋게 아린 마음으로 딸 기다렸을 엄마 생각에 못 이기는 척 손톱을 내밀었다.

"엄마, 이거 피 안 통해서 손가락 잘라지는 거 아니야."

"너는 어릴 때도 그러더니 꼭 그 소리야. 손가락 안 잘라져. 너도 내 손에 이렇게 꽁꽁 매야 해. 설렁설렁 매면 자다가 다 빠져나와."

엄마랑 마주 앉아 서로 손톱에 꽉 차게 봉숭아를 올리고, 랩으로 손을 돌돌 말아 실로 묶어주었다. 마지막으로 봉숭아 물을 들인 건 서울 다녀갔던 5년 전보다 훨씬 오래인데, 매년 봉숭아 물을 들인 것처럼 자연스럽고, 익숙했다.

엄마는 언제나 손톱이 예뻤다. 얇고 끝이 뾰족한 손톱 생김은 특별히 관리하지 않아도 그대로 예뻤지만, 봉숭아 물을 들이고, 투명한 매니큐어를 바르면 빨갛게 반짝이는 손톱은 정말 예뻤다. 매년 여름 우리 모녀는 서로의 손가락에 실을 동동 동여매 주며 첫눈이 올 때까지 봉숭아 물이 남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거나, 손톱 모양을 예쁘게 하려면 매일 손톱 옆을 꾹꾹 눌어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이루어질 첫사랑도 없고, 손톱을 예쁘게 만들고 싶은 열망도 없지만, 엄마 앞에 손을 내밀고 앉으니, 봉숭아가 우리를 그 시절로 돌려놓은 듯, 한 없이 따뜻하고 다정한 마음이 들었다. 시골 사는 얘기, 이웃집 험담, 알다가도 모를 덴마크 사람들 얘기를 도란도란 주고받았다. 그리웠던 시간들에도, 그리울 앞으로의 시간에도 꼼꼼하게 서로를 물들였다.


한국에서 한 달을 보내고 다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내내 생각했다.

나는 무엇을 얻으려고 매년 엄마랑 봉숭아 물들이는 시간을 내어주었을까?

나는 두런두런 엄마랑 수다 떠는 시간 대신 무엇을 누리고 있는 걸까?

애초에는 누군가가 되고 싶어서 시작한 타향살이였지만, 나는 여전히 누군가는 되지 못하였고, 아마도 이제는 더 이상 누군가는 되지 못할 것이고, 아무나로 이렇게 살아갈 텐데, 그렇다면 나는 왜 봉숭아 물도 마다하고 이렇게 먼 곳에서 결국 아무나 가 되었을까?


봉숭아 물이 반쯤 빠진 지금, 덴마크에서의 일상이 다시 나를 반쯤 채우고, 반쯤은 여전히 그리움에 젖은 나는 비행기에서 던졌던 질문의 답을 찾지 못한 채,  벌써 태연하게 아무도 아닌 삶을 살아가고 있다.

반쪽 남은 봉숭아 물이 다 빠져버릴 때쯤이면, 그리움마저 일상이 되어, 엄마 생각은 좀 더 가끔 하게 될 것이고, 고요한 덴마크의 일상으로 나를 꽉 채우고, 뻔뻔한 타향살이를 할 것이다.

살다 보니, 살려다 보니 여기까지 와 있을 뿐이다. 애초에 품었던 꿈이랄지 희망 같은 것들은 가슴 아래 화석이 되어 버린 지 오래지만, 더 이상 크게 아쉬울 것도 없다. 대단치도 않은 하루하루를 누리기 위해 엄마에게서 딸을 빼앗고, 나에게서 엄마를 빼앗은 세월의 의미는 결국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큰 의미는 있지도 않고, 그래도 있을지 모르는 작은 의미마저 찾지 못했지만, 외롭고 또 홀가 분도 한 오늘을 결국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리움도 삼키고 가끔 올라오는 눈물도 삼켜가며 김칫국 색 봉숭아 물이 다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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