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들린 밀러, <키르케>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키르케는 신으로 태어났지만 사실 그의 여정을 톺아보면 여느 인간의 성장 과정과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권위적인 아버지와 허영심 많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형제들에게 모든 관심을 빼앗겼다. 그나마 의지할 구석이었던 동생은 어느샌가 그의 품을 벗어났다. 첫사랑 글라우코스에게 모든 것을 바쳤지만 사랑은 온전하게 배신당했고, 연적에게 모진 복수를 가했지만 지나친 짓을 저질렀다는 죄책감이 일평생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다. 홀로서기에 나섰지만 세상은 험난하다. 다이달로스와 같은,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만남도 있었지만 그것도 일순. 어떻게든 혼자서 살아가는 삶에 익숙해졌지만 사무치는 외로움에 떨고, 결국 찾아오는 이들을 모두 돼지로 만들어버리며 견고한 벽을 세운다. 그 벽을 능수능란하게 해체해 버리는 운명적 존재를 만나고, 아이까지 가지며 어머니가 된다. 사랑은 떠났고 홀로 남아 아이를 지키며 온 세상의 모든 위협에 맞섰지만 끝내 아이는 장성해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났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며 키르케는 비로소 스스로가 어떤 존재이며 무엇을 바라는지 깨닫게 되고, 진정한 동반자와 함께하며 자기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찾게 된다. 우리가 잘 아는 그리스 신화의 배경을 덜어내고 나면, 결국 인간으로서 흔히 겪게 되는 무수한 시행 착오를 거친 끝에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진부한 성장 스토리가 남는다.
그럼 왜 키르케의 스토리가 재미가 있을까. '오디세이아'의 조연일 뿐이었던 마녀와 신화 속 여러 등장인물에 대한 참신한 해석 때문에? 거칠고 난폭한 올림포스의 신들에 의해 순결을 빼앗기고, 남편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긴 밤을 지새웠던 신화 속 여성들에게 새로운 목소리를 불어넣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현명한 지략가였던 오디세우스도 결국 자멸하고 마는 인간의 유한(有限)에서 오는 카타르시스 때문에? 아마 이 모두가 정답이 될 수 있겠지만, 내게 있어 이 질문의 정답은 "모두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내가 생각하는 나는 감정 기복이 크지 않고, 일단 다른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듣고 나서 생각하는 편이며, 내가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세심하게 배려를 하는 편이다. 사안을 함부로 재단하려 하지 않고 매사에 진지하며 무얼 하든 책임감을 가지고 임한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쌓이는 스트레스를 그때그때 해소하지 못하고 꾹꾹 눌러뒀다 터뜨리는 편이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되 별로 공감하려고는 하지 않으며, 제일 아껴야 할 가족들에 대해서는 외려 마음을 덜 쓰는 편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 단정적으로 평가하는 버릇이 있고 해야 되는 일을 미룰 수 있는 최대한까지 미루기도 한다. 30여년을 살았지만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뚜렷하게 정해놓은 것도 없고 내가 과연 10년 후에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도 상상이 되지 않는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도 인지와 정의를 끊임없이 하고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나와 주위에서 보는 나는 얼마나 일치할지 또는 어떤 부분이 다를지, 정말이지 알 수가 없다.
키르케는 태어나면서부터 주위 님프들과는 달랐지만 자신도 뭐가 다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저 관심을 받고 싶었고 그 다음에는 사랑을 받고 싶었으며 그 다음에는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그러다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 줄 존재가 필요해졌고 더 나아가 자신의 운명을 함부로 뒤틀어대는 신들에게 저항하게 된다. 그리고 끝내는 자기 자신에게 신성(神性) 대신 생(生)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숱한 굴곡을 거치면서 결국 키르케는 자기 자신의 이해 수준을 높여 갔고,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다. 수백 년이라는 장구한 시간 속에서 소외감과 고독과 사랑과 허영과 분노와 질투와 달관 등을 모두 겪은 끝에, 그제서야 말이다. 신인 키르케가 주인공으로 채택된 이유는, 어쩌면 이 모든 과정을 거치기에 인간의 삶이 너무나도 짧기 때문 아니었을까.
오디세우스가 키르케를 찾을 것이라는, 그 '한심한' 예언 자체가 운명인 것은 오디세우스가 키르케가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거울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디세우스는 키르케의 능력을 알아볼 정도로 지혜롭고, 동시에 신들이 인간을 제멋대로 쥐고 흔드는 것에 대한 분노도 품고 있다. 그런가 하면 키르케로 하여금 그런 오디세우스조차도 스스로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는 반면 교사가 되기도 한다. 아무리 지혜로웠다 한들 오디세우스는 페넬로페와 달리 자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어디까지나 항성을 맴돌 뿐, 그 자신이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이 되지는 못한 것이다. 결국 키르케가 텔레마코스를 진정한 동반자로 선택하게 된 건 텔레마코스가 아버지보다 스스로를 더욱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