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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걱정쟁이 Nov 05. 2020

서스턴 클라크, <라스트 캠페인>

바다 건너 먼 나라의 백마 탄 초인을 동경하며

2016년 미국 대선 때 나는 기자 시험을 막 준비하기 시작한 대학생이었다. 지금 조 바이든처럼 그때도 힐러리 클린턴이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심지어 그땐 힐러리 클린턴이라는 선례도 없었기 때문에 더욱. 나도 그 예측에 동의했다. 내가 기억하는 도널드 트럼프는 초등학생 시절 즐겨 봤던 미국 프로레슬링에서 돈만 믿고 허세를 부리다 프로레슬러들한테 된통 당하는 광대였으니까(심지어 삭발당하는 것도 봤다. 물론 다 대본이지만). 그 광대가 미국 대통령이 된다고? 거짓말! ...그리고 그 거짓말은 현실이 됐다. 


전 세계 전문가들의 예측을 뒤엎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당연하게도 미국 대선 결과는 그 주 내가 들어가 있었던 논술 스터디의 논제가 됐다. 원래 기자 준비하는 소위 '언시생'들은(나는 이 표현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실제로 할 줄 아는 건 쥐뿔도 없으면서 온갖 문제에 한 마디씩 거들기 좋아하는 조선시대 유생과 다를 바 없으니까. 나는 외신은커녕 한국 신문도 제대로 안 봤기 때문에 으레 그렇듯이 아는 게 별로 없었고 자연히 내 글은 인상 비평에 가까웠다. 힐러리 클린턴이 제기했던 정치적 올바름이나 페미니즘 등의 이슈가 '뜬구름 잡는 소리'였기 때문에 유권자들을 사로잡지 못했다, 뭐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스터디원들의 피드백에 시달린 건 말할 것도 없다. 사실 나 자신이 스터디에서 시니컬한 피드백을 일삼았기도 했고..


그리고 4년이 지나 다시 미국 대선이 치러졌다. 여론조사기관과 주류 언론이 4년간 칼을 갈았다지만 이번에도 그들의 예측은 빗나갔다. 낙승이 예상된다던 조 바이든은 경합주 플로리다에서 패배하는 등 트럼프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 개표가 계속 진행되면서 바이든의 신승이 굳어지는 흐름이지만, 온갖 삽질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는 유권자들에게 호소력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미국 대선을 의식한 것은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대선이 치러진 날에 서스턴 클라크의 '라스트 캠페인'을 다 읽었다. 여기서 캠페인은 '선거 운동'을 의미한다. 주어는 로버트 F. 케네디(이하 '바비'. 바비는 그의 애칭)다. 우리가 잘 아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이다. 형이 대통령으로 있을 동안 법무부 장관으로 형을 보좌했었다. 선거는 1968년 미국 대선이다. 바비는 이때 민주당 경선 후보로 출마했다. 민주당 후보군 중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혔지만 중요한 분기점이던 캘리포니아 예비 선거 승리 직후 팔레스타인계 이민자 청년에게 암살당했다. 1963년 JFK가 암살당했으니 형과 동생이 5년 주기로 세상을 떠난 셈이다.


책을 번역한 칼럼니스트 박상현씨의 설명처럼 1968년은 여러 모로 2020년을 닮았다. 흑인 인권운동의 대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이해 암살당하면서 흑인들의 분노가 폭발했고 미국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이전 정권이 시작했던 베트남 전쟁은 지지부진한 상태로 시간만 흘러갔다. 미국은 백인과 흑인으로, 부유한 중산층과 슬럼의 빈곤층으로, 징집유예의 혜택을 누리는 대학생과 전쟁에 끌려간 고졸로 찢어졌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사방팔방으로 찢어진 나라를 물려받게 될 판이었다. 


바비는 찢어진 나라를 다시 하나의 미국으로 묶어내겠다며 도전장을 던졌다. 그는 출마 선언에서 "현재 흑인과 백인, 부자와 가난한 사람, 청년과 노년층 사이에 존재하는 틈"을 메우기 위해서라고 이유를 밝혔다. 처음에는 형 JFK의 못다 이룬 꿈을 이어나가겠다는 의지가 강했지만, 선거 유세를 반복하면서 그는 자신만의 어젠다를 함께 제기하기 시작한다. 그는 베트남전에 징집돼 사망하는 군인들, 빈곤과 절망에 시달리다 자살하는 인디언들, 킹 목사가 암살당한 후 실의에 빠진 흑인들의 희생을 다른 미국인들이 함께 짊어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수십 번의 유세에서 되풀이했다.



케네디가 학생징집유예 문제에 그토록 관심을 가진 이유는 케네디의 애국심의 중심을 이루는 사상, 즉 '희생의 균등한 부담'에 반하기 때문이다. 그는 형 JFK와 마찬가지로 미국인이 평등하게 태어났을 뿐 아니라 미국의 정치, 미국이 벌이는 전쟁에 참여해야 할 동등한 책임이 있다고 믿었다. (...) 그는 희생을 균등하게 부담해야 한다는 신념의 연장 선상에서 미국인은 미국 정부가 국민의 이름으로 하는 일에 대한 책임을 공유한다고 주장했다. (301쪽)



바비의 선거 운동에는 오늘날의 정치인들에게 흔히 찾아볼 수 없는 특징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청중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바비는 징집 유예의 혜택을 보고 있는 대학생들 앞에서 "징집 유예 법률을 폐지할까 한다"라고 했다. 인종 갈등에 관심이 없고 흑인들의 폭동을 두려워하는 백인 중산층들 앞에 서서 흑인들의 좌절과 절망감을 이야기하며 공감을 호소했다. 사우스다코타주에 가선 다른 후보들이 모두 한번씩 들르는 러시모어 산(대통령 4명의 얼굴이 새겨진 그곳)에 가는 대신 인디언 보호구역을 방문해 11살짜리 소년과 시간을 보냈다. 그런 의미에서 바비는 적어도 포퓰리스트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다른 하나는 그가 언제나 시민들에게 귀를 기울였다는 것이다. 자신의 의견에 공감하지 않는 시민들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과정을 통해 최대한 그들을 설득하려 했다. 열차를 타고 인디애나의 시골 마을들을 돌며 농부들을 만나고, 히스패닉과 흑인들이 사는 동네에서 카 퍼레이드를 벌이며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시민들은 바비가 자신에게 공감하고 이해한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를 지지했다. 흑백 갈등이 최악으로 치닫던 때에 흑인들이 바비를 '믿을 수 있는 마지막 백인'이라고 느낀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케네디는 또한 작업복과 고무 부츠 차림의 농부가 농업 문제에 관한 질문을 적은 노란색 노트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일행이 기다리는 사실에 개의치 않고 농부와 길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고는 농부가 건네준 질문지를 주머니에 넣고 도시로 들어가는 동안 라일에게 이렇게 말했다.

"각종 서류와 타이핑된 편지를 늘 받지만, 손으로 쓴 편지를 받으면 더 주의해서 읽습니다." (324쪽)



라스트 캠페인을 읽고 난 지금,  2016년 미국 대선에서 왜 힐러리가 졌는지를 다시 생각해 봤다. 지금 그 논제를 쓰라고 한다면 나는 힐러리가 유권자들에게 공감을 이끌어내려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쓸 것이다. 힐러리는 아이오와, 위스콘신 등 러스트 벨트 지역이 민주당의 텃밭이라는 것만 믿고 유세를 소홀히 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이 지역에 거주하는 힐빌리(미국 중부 애팔래치아 산맥 지역에 거주하는 가난한 백인들을 일컫는다)들의 좌절감에 주목했고, 결국 이들의 지지에 힘입어 대세를 뒤집었다. 힐러리는 아마 힐빌리들의 삶이 얼마나 열악한지, 머리로는 알아도 피부로는 전혀 느끼지 못하지 않았을까. (힐빌리들의 실태가 어떤지를 조금이라도 느껴보려면 J. D. 밴스의 '힐빌리의 노래'를 읽으면 좋다) 조 바이든이 이번 대선에서 압도적인 대세론과 트럼프의 장대한 삽질에도 불구하고 고전한 이유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힐러리나 바이든이나, 결국 교육을 잘 받은 엘리트 기득권이라는 이미지를 지우기는 어려우니까.


이런 생각들도 결국에는 뇌피셜에 불과하다. 난 외신을 꼼꼼히 챙겨본 것도 아니고 미국 정치를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았다. 그런 의미에선 아는 것도 없이 끄적이던 언시생 시절에서 그다지 발전하지 못한 셈이다. 다만 라스트 캠페인에서 묘사된 로버트 케네디는 힐러리나 바이든에게선 느끼지 못한 생동감을 풍겼다. 당시의 미국인들도 그에게 거는 기대가 크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면 대통령은커녕 대선 후보로 확정되지도 않은 그의 죽음에 200만 명이나 되는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장례 열차를 배웅하진 않았을 테니까. 


한국 정치에는 왜 바비와 같은 인물이 없을까, 라는 식상한 의문은 품지 않으려 한다. 나는 2020년의 한국 여론 지형이 어떤 의미에선 1968년 미국보다 더욱 극단적인 진영 논리로 나뉘어 있다고 느낀다. 지금 바비와 같은 정치가가 혜성처럼 등장하길 바라는 건 백마 탄 초인을 기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여당과 야당의 주요 인사들 중 그 누구에게서도, 자신의 철학과 어젠다를 관철하려는 일관성이나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시민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려는 관용 중 어느 것 하나 찾아볼 수 없다는 건 다소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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