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해보지 못했던 꿈
나름의 시간 개념으로 보자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속하던 어린 시절,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서 몸부림치던 때가 있었다. 가슴에 묻어버린 꿈 하나는 모두가 가지고 있을 것이다. 뒤적이다 보면 하나쯤 튀어나오는 이루지 못한 꿈, 시도해보지 못했던 꿈이 있지 않을까?
나에게는 피아노가 그랬다.
엄마의 입버릇으로 우리 집은 찢어지게 가난한 줄 알았다. 세뇌를 당한 셈이다.
아버지가 버젓이 회사를 다니셨고 알고 보니 적금도 꽤 부었던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엄마에게 세뇌를 당하고 살았다. 그래서 뭐 하나 사달라고 했던 기억이 없다. 진짜 없다.
떡볶이를 먹고 싶었던 기억이 나에게는 가장 큰 욕망이었는데 그 충동이 가시지 않을 때는 동전을 모아둔 돼지의 배를 몰래 갈라서 몇 개를 빼들고 분식점으로 달려갔던 기억이 난다.
그런 나에게 피아노는 신세계 물건 같았다. 당시만 해도 엄청 생경했던 '아파트'라는 곳에 부잣집 딸로 통하던 내 친구가 살았다. 그 집에서 먹은 거나 그 집에서 보았던 장난감이나 그런 것들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갈색 나무 커버를 위로 올리면 빨간 천이 덮여있던 하얗고 검은건반의 피아노만 또렷이 기억난다.
젓가락 행진곡 하나 치는 실력이었던 친구의 뒷모습이 어쩜 그렇게 보기 좋은지.
그 소리는 또 무엇인지. 가슴이 콩닥콩닥 뛰던 기억.
"피아노는 무슨 피아노?"
나는 학원을 다니지 않았다. 남동생들은 태권도에 바이올린에 온갖 학원을 다 다녔던 것 같다. 왜 나는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을까? 남아선호 사상. 아들이 잘 되어야 미래가 달라지는 생각이 우리 엄마에게 각인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땐 그랬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생전 사탕 하나 사달라고 해본 기억이 없는 나는 며칠을 가슴에 묻고 있다가 처음으로 엄마 앞에서 입을 뗐더랬다.
"피아노 학원 보내줘."
"피오는 무슨 피아노?"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피아노 따윈 사는데 1도 도움 될 게 없다는 엄마의 또렷한 가치관 앞에 나는 갑자기 반항했다.
"그럼 뭐라도 보내줘."
피아노 말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왜 그랬을까?
갑툭튀로 뱉어낸 말 때문에 나는 주산학원을 다녔다.
암산을 하고 주산 알을 튀기면서 3급까지 땄다. 엄마의 큰 그림이 나를 여상에 보내서 은행원으로 취업시키는 것이었음을 중 3 때 선생님과 진학 상담을 하면서 알게 됐다. 선생님의 훈계(?)로 엄마의 꿈은 좌절되었고 나는 상업고등학교가 아닌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다.
은행원이 되진 않았지만 주산을 배운 덕분에 고등학교 때까지 선생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시험 기간이 끝나면 교무실로 호출되는 대상이 됐다. 친구들의 시험지를 매기고 평균값을 구하는 작업이 내 몫이었다. 그리고 교무실에서 짜장면이나 떡볶이를 먹고 했었다. 기막히게 좋은 보상이었다.
세상 어렵기만 했던 엄마와 친구처럼 말하게 되면서 가끔 피아노 사건을 언급할 때가 있었다. 엄마의 잔소리 막음용 무기가 필요한 경우다. 걱정과 잔소리가 빨간 불이 켜질 때까지 진행이 되다가 내 심박계에 영향을 줄려고 할 때쯤 꺼내 드는 방패 용 레퍼토리인 셈이다.
"딱 한 번 하고 싶다고 말한 피아노도 안 가르쳐주고서는."
"말을 하지."
"말했잖아."
"내가 알았나, 뭐.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지~."
하고서는 엄마는 슬쩍 싱크대로 간다. 냉장고를 열었다 닫았다 하고 먹을 걸 슬쩍 내민다.
"김치나 가져가."
이렇게 다투는 것도 언젠가 애틋한 기억이 되겠지.
다시 돌아와서, 이제 나는 피아노를 친다.
작년 코로나가 기승일 때, 피아노를 사야겠다고 갑자기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질렀다.
술 한 잔 마시면 5만 원 10만 원 그냥 나가는 세상인데 평생의 내 옆에 있을 피아노 하나 못 살 거 뭐냐 싶은 마음으로 질러버렸다. 후회는커녕 두고두고 잘했다 싶다.
목돈에서 거금 1백만 원을 빼서 사버린 피아노가 작디작은 서재방을 꽉 채우고 있다. 괜찮다. 못다 이룬 꿈으로 채운 거니까. 혹시 아는가? 언제인가 갑자기 작곡을 할 지도. 꿈은 이루어진다.
이번 주 금요일과 토요일, 이틀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글 작업과 책 읽기를 했더니 노곤함이 밀려왔다. 당이 떨어진 뇌가 쉬고 싶다고 아우성을 치는 것 같아서 오늘은 피아노 치면서 쉬기로 했다. 부담 없이 치고 싶을 때 연습하기가 원래의 계획이었다. 요즘 연습이 뜸했던 것 같은데도 어느새 손이 조금 편해진 것도 같다. 피아노 대신 기타라도 치자고 대학을 가서 혼자 독학으로 배운 적이 있다. 동아리 선배와 동기와 후배들이 기타를 들고 목놓아 노래하던 사람으로 나를 기억하는 이유다. 기타를 열심히 쳤지만 그래도 피아노는 피아노다. 마음의 한편, 요상한 빈자리에 늘 피아노가 놓여있었다.
언젠가 딱 한 번 피아노 학원에 등록한 적도 있다. 한 달을 다니고는 일과 바쁨을 핑계로 중단했다. 그때 샀던 바이엘 1권과 2권으로 지금 연습 중이다. 바이엘이 지겨우면 유튜브를 보면서 코드를 익힌다. 익힌 코드로 좋아하는 곡을 몇 번 쳐보고, 개미 목소리로 노래도 부른다. 꺾이고 휘고 마르게 살아오기 전의 내가.
바이엘 연습곡 중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했다. 이음줄과 붙임줄 연습곡인데 느긋한 것이 꽤 리듬이 좋다. 갑자기 가사를 써볼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했다. '어느 여름 날'이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녹음된 연습 파일을 듣고 있자니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엄마.
언제 한 번 피아노 녹음파일을 들려줘야겠다.
트롯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