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Life goes on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erry Jul 22. 2020

타입디자인 ASMR

<The Last Punchcutter>를 보고 듣고 느낀 여러 감정들

The Last Punchcutter.



The Last Punchcutter. (클릭 시 새창에서 영상 재생.)


어느 날, 신비한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나를 이 영상으로 안내했다. 이탈리아 토리노의 한 활자 공방, 마지막 남은 펀치 커터가 일하는 7분 남짓의 짧은 필름이었다.


펀치 커터는 마치 '토이스토리 2'에서 우디의 팔을 꿰매 주던 '수선공 할아버지'의 현실 버전 같았다. 내공 있어 보이는 얼굴 주름과 흰머리가 닮아있었다. 토이스토리 시리즈를 정말 좋아하는데, 수선공 할아버지가 나오는 장면을 참 재밌게 봤다. 뭐든 다 들어있을 것 같은 도구가방을 열 때, 가방이 지나칠 정도로 확장되며 펼쳐지는 장면을 사랑한다. 이 씬에 나오는 사운드도 레전드급 ASMR을 자랑한다.


<토이스토리 2> 장면중.


<The Last Punchcutter>역시 ASMR 맛집이다. 전혀 설명이나 말소리가 없다. 오로지 손의 움직임에 의한 도구와 물성의 마찰음, 집중하는 들숨과 날숨, 입으로 불어 쇳가루를 날리는 소리 등 베테랑 펀치 커터의 노고가 소리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대부분 줄질을 하는 거친 마찰음이 들리지만, 초반의 줄질과 후반의 줄질은 손의 압력이 다른 느낌이다. 아주 잠깐씩 찌르는 듯 날카로운 소리와 갑작스레 큰 공기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그렇다고 음량을 낮추고 본다면 미세하고 예쁜 소리를 놓칠 수도 있다.


영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소리는 글자를 모두 깎아낸 후 손으로 "슥- 슥- 슥-" 하면서 납활자를 닦아낼 때 나는 높고 가는 소리다. 거의 들릴락 말락한 맑고 간지러운 소리다. 활자를 완성한 뒤의 보람과 기쁨을 표현하듯, 따뜻한 소리가 울린다.



커피는 디자이너의 생명수.


시공간을 초월한 공감대를 느낀 장면이 있었는데, 커피와 담배 마시는 씬이다. 디자이너와   없는 영혼의 음료 커피를 마시는 장인의 모습에 '좋아요'버튼을 꾸욱 누르고 말았다. 현대인과 다를  없이, 일에 집중하다가도 잠깐 기호식품을 즐기는 행위는 누구라도 공감할 수밖에 없는 장면 이리라 생각된다. 라스트 펀치커터께서도 휴식의 중요함을 아시는 것이겠지.


100년 전쯤에 내가 태어났다면 '글꼴 디자이너'라는 직업 대신 '펀치 커터(Punchcutter)'로 살았으려나..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도구와 환경만 다를 뿐, 펀치 커터와 같은 일이지만 일하며 내는 '소리'는 전혀 다르다. 수백 수천번의 마우스 딸깍거림과 키보드를 누를 때 압력에 따른 크고 작은 타이핑 소리, 가끔 들려오는 프린터의 소음이 전부일 거다. 그와의 공통점은 오직 커피 마실 때의 호로록거림 뿐일 듯하다.


제목의 '마지막(The Last)'이라는 단어 본연에 담긴 코 끝 찡한 느낌에 여러 복잡한 생각이 스친다.

미래에 '마지막' 디지털 폰트 디자이너로 기록될 사람은 누구일까. 그 미래는 언제일까.



*

유튜브의 자극적인 썸네일에 질렸다거나,

먹방 ASMR 말고 색다른 소리를 듣고 싶다면,

금속활자시대의 라틴활자 디자이너가 작업하는 방식이 궁금하다면,

The Last Punchcutter 를.


 


매거진의 이전글 코로나19와 뜻밖의 소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