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나비 작업 일지-1]
어느 날, <한글 활자의 은하계>를 침대 한쪽에 쫙 펼쳐 엎드린 자세로 보고 있었다.
10cm 가까운 두께의 책 속 많은 자료들을 천천히 감상하며 보던 도중, ‘휘언’을 발견했다. 한 펼침면의 반쪽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던 ‘휘언’은 다른 자료들을 제치고 홀로 빛나 보였다. 나는 엎드려있다가 포스트잇 플래그를 가지러 벌떡 일어났다.
물론 책 안에는 저자 류현국 교수님이 모으신 보물 같은 한글꼴 자료들이 가득했지만, 왠지 오직 ‘휘언’만 눈에 들어왔다.
‘휘언’이 유독 눈에 띄었던 이유를 곱씹어보면, 당시 나는 라틴활자에 큰 관심을 두고 있었고, 화려한 알파벳 필기체 폰트와 레터링들을 유심히 관찰하는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알파벳 스크립트체의 공간감과 질감을 닮은 ‘휘언’이 그래서 눈을 사로잡았던 것 같다.
흘려 쓴 ㄹ에서 알파벳 m을,
대각선으로 시원하게 뻗은 ㅅ에서 소문자 h, l을,
그리고 전에 못 본 샤프하고 건조한 텍스처를 느꼈다.
궁서체의 계보에 있지만 왠지 낯선 느낌이 드는 이 글씨체가 좋게 느껴졌다.
글꼴의 유려함을 보며 이런 폰트를 만들 수 있을까? 라며 단순한 상상을 했었다. 이런 스크립트 스타일의 한글 폰트 개발은 힘들겠지만, ‘비슷한 텍스처를 지면에 표현할 수 있다면 좋겠다’라는 뿌옇고 막연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7회 한글글꼴창작지원사업 수혜작으로 선정되어 ‘범나비’를 제작 중입니다.
[범나비 작업 일지]는 글꼴을 디자인하며 느낀 고민과 생각을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