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에서 본 알폰스 무하의 작품들
프라하에서 지내는 동안 달러 대비 코룬 환율이 괜찮은 편이어서 가지고 있는 달러를 조금씩 환전해 썼습니다. 어느 날 아침 환전하러 가는 길, 근처에 무하 박물관이 있는 걸 우연히 보았습니다.
알폰스 무하 뮤지엄은 프라하의 대표적 관광포인트입니다.
여행책에서 읽어서 뮤지엄의 존재는 알고 있었는데, 서울에서 무하 전시를 본 적이 있기에 방문을 고민했습니다. 그래도 현지에서 보는 건 특별할 거라며 도착하니, 사실 규모는 작은 편이어서 조금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친절하게 한국어 가이드북이 마련되어 있고, (일본어는 많아도 한국어는 희귀..) 작지만 지루하지 않은 콘텐츠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무하는 화가이자 광고쟁이, 디자이너, 인쇄업자였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아르누보 화풍과 더불어 상업적 내용을 탁월하게 전달했습니다.
상업적 내용 전달에서 빠질 수 없는 타이포그래피. 제가 자연스레 눈이 간 것은 글자였습니다.
무하 입장에서 타이포그래피에 대해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아마 일반 서체 중 산세리프를 썼다면 딱딱해 보였을 것이고, 세리프 서체 역시 새로운 화풍인 아르누보와 어울리지 않았을 거예요. 그림마다 레터링 형식이 다른 것도 각 그림의 조형에 어울리도록 새롭게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위의 첫 번째 그림은 무하를 유형하게 만든 'Gismonda' 포스터인데, 배우 Sarah Bernhard를 아름답고 우아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글자 또한 곡선적이고 우아한 느낌을 연출해 하나의 그림을 완성합니다.
두 번째 포스터는 여자가 뾰족한 관을 쓰고 칼을 들고 있는데, 글자도 단단하고 뾰족하며 날카로운 형태입니다. 맨 마지막 그림의 JOB의 'J'는 곡선적인 머리칼 형태와 찰떡궁합을 보여줍니다. 그림이 주는 느낌과 레터링을 관찰해보면 공통적인 조형 요소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박물관 전시품 중에는 창문 도안이 있었습니다. 도안을 보니 전 날 방문한 성 비투스 대성당이 자연히 떠오릅니다. 성당 안에는 이 도안의 실물이 한쪽 창을 이루고 있습니다. 유독 이 창만 다른 창들과 그림 형식이 달랐고, 원형 곡선이 반복되는 것이 ‘무하’ 스러웠습니다. 다른 창과 비교해보니 확연히 스타일 차이가 느껴졌습니다.
반복되는 원과 곡선 형태, 그리고 중앙 하단에 레터링은 유연한 알파벳 형태로 무하의 사인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창에서 레터링의 존재는 독특하게 느껴지는데, 다른 창에서는 글자를 찾아보기 힘들어서 더 신기했습니다.
이 레터링의 내용이 재미있는데, 당시 체코의 한 은행이 제작 후원을 했다는 내용입니다.
내용이 좀 의아하지만, 참 디자이너스러운 발상이구나 생각합니다. 크레딧을 정확히 기록하는 것은 디자이너에겐 중요한 작업이죠. 그렇지만 당시 무하가 유명인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어요. 대성당의 스탠드 글라스에 누가 감히 광고 배너를 달 수 있었을지.
서체를 만들 때도 사용자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크레딧이 내장되어 있습니다.
창작자와 만든 회사뿐 아니라 클라이언트의 정보도 꼼꼼히 확인한 후 넣습니다. 돈을 받고 일하는 만큼 크레딧을 정확히 표기하고, 배포되는 서체라면 홍보까지 멋지게 해야 클라이언트는 기뻐합니다.
프라하에서 가장 큰 성 비투스 대성당, 꾸준한 관광객, 관광객의 눈높이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크레딧. 무엇보다 알폰스 무하가 예쁘고 정성스럽게 그린 레터링. 이보다 클라이언트를 기쁘게 할 크레딧이 있을까요. 이 은행, 엄청난 홍보효과를 보았을 텐데 지금도 건재한지 궁금합니다.
스탠드 글라스 도안을 지나, 무하에 대한 짧은 영상을 본 후 전시 관람을 마쳤습니다.
뮤지엄 방문을 기념하고 싶었기 때문에 아트숍으로 향했습니다. 일부러 레터링이 있는 기념품을 찾아, 작은 마그넷을 구매했습니다. 마그넷을 손에 꼭 쥐고 '아르누보의 신이시여 나에게 오소서' 짧은 기도를 하며 뮤지엄을 나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