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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흔적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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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멋대로 Oct 27. 2024

흔적 (1)

1.


-우리 딸래미는 입이 너무 짧어.


-아닌데. 나 엄청 열심히 먹었는데.


보경이 손을 배에 얹었다. 손바닥 무게조차 버거웠다. 신 트림이 올라올 것 같았다. 아고 배불러, 의자 끄트머리로 몸을 미끄러뜨렸다. 빨래처럼 늘어진 딸을 보고 남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를 옆으로 쓸어넘겼다. 네모난 안경테 위로 머리카락 몇 가닥이 쏟아졌다. 오목한 불판에 생삼겹이 한 줄 더 올랐다. 새로 피어오른 연기가 희뿌연 공기에 녹아들었다. 앞치마를 두른 보경 엄마가 인상을 쓰면서 일어났다. 이거 봐 이러니까 그냥 후라이팬에 딱 구워다가 먹자니까는, 하며 주방 후드를 작동시켰다. 앞 뒤 베란다 창문을 다 열어 뒀지만 이상하게 바람이 잘 통하지 않았다. 보경 엄마는 식사시간 내내 언짢았다. 보경 아빠는 전날 배송받은 캠핑용 그리들을 당장 써 봐야겠다 고집을 피웠다. 물건을 샀으면 하자가 없는지 바로바로 확인해 봐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식탁에 버너를 올리고 콧노래를 부르면서 고기를 구웠다. 캠핑용 컵까지 가져다 두고 맥주를 따라 마셨다. 그 고집을 모녀는 당해내지 못했다. 눈을 흘기던 엄마가 깨작거리다 젓가락을 놓았다. 보경은 엄마를 닮았다. 밥 한 공기에 고기 몇 점이면 금방 배가 불렀다. 아빠가 건넨 맥주까지 한 잔 마셨으니 한계였다. 자신은 동생과 달랐다. 아빠에게 보조를 맞춰 줄 수 없었다.


넓적한 불판에 달라붙은 살점 부스러기가 자글자글 끓었다. 보경 아빠가 키친타월로 까만 부산물을 쓸어냈다. 한가운데 고인 기름에 길게 찢어둔 김치가 올랐다. 시큼한 소리와 냄새가 촤르르 끼쳤다. 보경은 머리가 멍했다. 눈두덩 무게를 그대로 느꼈다. 과식을 하면 사고와 행동이 모두 더뎌진다. 누구는 배 불러서 발라당 자빠지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고 했다. 보경은 아니었다. 사고회로가 빠릿하게 돌아가지 않으면 불안했다. 족쇄를 차고 다시 깊은 물 속으로 가라앉아 버릴 것 같았다. 모든 생명은 적당히 배 고픈 상태로 살아야 바람직해. 그래야 입을 열고 살지, 보경이 생각했다. 주려야 기민해진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짹짹댄다. 배 부르면 입을 닫는다. 생각을 않는다. 참가자에서 방관자가 된다.


-보경아 이거 봐라 야.


보경 아빠가 김치를 돼지 기름에 또 빠뜨렸다. 보경은 불판 위 사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배에 얹은 손이 위아래로 넘실댔다. 아무 대답 않고 가로로 넓적한 캠핑용 버너를 들여다봤다. U자형 스테인레스 튜브 위 일정한 간격으로 뚫린 구멍에서 퍼런 불꽃이 볼볼볼 솟아올라 일렁였다. 역시 첫 시도가 변변찮았어야 했다. 작은 성공의 불씨가 보경 아빠 마음 속 욕망의 짚단에 불을 지폈다. 이 버너를 처음 샀을 때도 아빠는 거실에서 첫 개시를 했다. 몸통에 꼭 맞게 체결되는 사각 철판 냄비에 채소와 소고기를 넣고 전골을 끓였다. 허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겨울철 실내에 떠오른 수증기는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포근하고 따스하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꽃 피는 계절에 굽는 고기는 다른 문제였다. 살점을 태운 연기는 수증기와는 다르다. 어딘가 스며드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후드 없는 식탁에서 고기를 굽는 행위는 처음부터 좋은 아이디어일 수 없었다. 주변 공기가 점점 탁해졌지만 보경 아빠는 아랑곳않았다. 굽고 먹고 마시고 기름 닦고 감탄사를 내뱉느라 바빴다. 자욱한 연기는 쇼의 맛을 살리는 무대 연출 효과였다. 보경 엄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만 좀 구워 불난 줄 알겠어, 참다 못해 소리쳤다. 보경 아빠가 아내 눈치를 살피더니 풀 죽은 체 했다. 알았어 이거까지만 굽고, 집게를 들었다. 노릿하게 익은 한 줄 끄트머리를 잡고 가위질을 했다. 써걱, 툭. 써걱, 툭. 잘려 나간 고기가 한 점씩 떨어졌다. 하나 둘 불판 경사면에 위태롭게 쌓여 나갔다. 마지막 가위질을 하려는데 몸통을 파고든 가위 날이 끝까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뼈가 걸렸다. 가위를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보경 아빠는 각도를 틀었다. 뼈가 안 붙은 사선으로 가위질을 했다. 날이 아까처럼 잘 들지 않았다. 자른다기보다 찢어내듯 분리해냈다. 떨어진 고기 조각이 불판 위를 통 통 구르다 기름 구덩이 속으로 퐁 빠졌다. 치이익, 불씨가 젖어 사그라드는 소리를 냈다. 빼용빼용빼용빼용빼용- 골 인을 축하하듯 요란스러운 경보가 울려퍼졌다. 남자가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가 쓰러질 듯 기우뚱했다. 어어, 어어, 하면서 집게를 들고 보경 아빠는 불판과 천장을 번갈아 쳐다봤다. 주방 천장에 달린 연기감지기의 빨간 램프가 정신 없이 깜빡였다. 보경 엄마는 귀를 틀어막았다. 꺼, 꺼. 뭐 하는 거야 진짜. 우왕좌왕하는 엄마와 아빠 옆에서 보경은 점차 거세지는 심장 박동을 느꼈다. 머리가 댕댕 울렸다. 핏기가 빠져나간 것처럼 한기가 들면서 손발이 땀에 젖었다.


화재발생- 빼용빼용빼용빼용빼용-

화재발생- 빼용빼용빼용빼용빼용-


보경은 민혁이 어릴 때 타던 아동용 자전거의 전자벨 소리를 떠올렸다. 오른쪽 손잡이에 달린 빨간 버튼을 엄지로 누르면 소리가 '발사' 되었다. 삐요오옹 빼애앵 때로로롱 두두두두 콰콰과광. 신경을 거스르는 굉음. 보경은 소음에 예민했다. 꼭 그 소리에 얻어맞는 것 같았다. 귀를 틀어막고 그만하라고 동생에게 고함을 쳤다. 싫다는 누나를 쫓아다니면서 민혁은 더욱 거세게 소음을 쏘아댔다. 메롱 메롱, 방실방실 즐거워했다. 미운 짓만 골라 하던 천진한 악마.



민혁은 짓궂은 장난을 워낙 좋아했다. 벌레를 집어 들고 무서워하는 아이들을 쫓아다니거나 구석에 숨어 있다 튀어나오며 왁 소리를 질러 몇몇을 놀래켜 울리기도 했다. TV 프로그램이나 만화영화에 나온 장난을 그대로 따라하다 큰 사고를 낼 뻔한 전적이 많아 보경 아빠가 TV를 거실에서 한동안 치워 버린 적도 있었다. 호기심과 모험심이 강했던 민혁은 탐험이나 여행을 주제로 한 콘텐츠를 특히 좋아했다. 이름도 생소한 낯선 곳의 낯선 환경을 담은 모든 장면을 동경했다. 정글에 가고 싶어 했고 실은 그곳엔 없을 야생 사자를 만나고 싶어 했다. 불을 피워 보겠답시고 풀과 나뭇가지를 모아 와서는 손바닥 껍질이 벗겨지도록 몇 시간을 비벼 대다가 피부과 치료를 받기도 했다. 초등학교 삼 학년 때는 친구 셋을 더 모아 모험단 SAC, 삼익초 어드벤처 클럽을 만들었다. SAC는 리더 민혁의 주도 아래 학교와 집 사이 익숙한 영역을 벗어나 거의 가보지 않은 골목과 장소를 찾아다녔다. 민혁의 방에는 하얀 종이 위에 색연필로 그린 지도가 붙어 있었는데 어딘가를 새로 탐험하고 돌아올 때마다 약도와 관련 설명이 늘어났다. SAC는 얼마 못 가 부모들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말았는데 방학 때의 사건 때문이었다. 저녁 여섯시가 다 되어 보경 엄마 휴대전화로 전화가 걸려 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받아 보니 민혁이었다. 아침 아홉 시에 나간 애가 왜 아직 들어오지 않나 걱정을 하던 참이었다.


-너 뭐해. 어디야.


-나, 떡볶이 집.


우물쭈물하는 말투가 이상해서 보경 엄마가 민혁을 다그치려는데 어떤 남자가 전화를 바꿔 받았다. 순간 보경 엄마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납치. 유괴. 감금. 무시무시한 단어가 떠올라 온 몸이 얼어붙었다. 예 어머니 놀라지 마시고요, 라고 잔뜩 놀래키면서 시작한 남자의 말은 이랬다. 애들이 분식을 잔뜩 시켜 먹고 도망을 가려 해서 붙잡았다. 와서 계산을 해 주셔야 할 것 같다. 분식집은 집에서 차로 사십여 분은 가야 하는 거리에 있었다. 택시를 타고 돌아가면서 보경 엄마는 민혁에게 자초지종을 들었다. 


-하루 동안 갈 수 있는 만큼 왕창 걸어 보자고 했어. 근데 배가 엄청 고팠는데 돈이 없었어. 점심에 다같이 짜장면 사 먹는 데 돈 다 썼거든. 


그 날 보경 아빠는 이례적으로 매를 들었다. 민혁은 다른 때와 달리 고분고분하게 체벌을 받았다. 억울해하지 않았다. 눈물을 보이지도 않았다. 열 살배기 인생 최대의 모험을 복기하느라 오히려 신이 나 보였다.


목소리가 제법 걸걸해질 즈음 민혁은 전에 두드러지지 않던 다른 성향을 전면에 드러내기 시작했다. 장난꾸러기였지만 뚱하니 새침한 데가 분명 있던 아이였다. 남자아이 특유의 활동성 아래 숨은 예민함과 섬세함이 점차 껍질을 깨고 나왔다. 방문을 꼭 닫았고 말수가 줄어들었고 간혹 신경질을 냈다. 웹상에 무언가 끄적여 올리기 시작했다. 이성에 관심을 많이 보였고 얼굴을 뒤덮은 여드름에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브랜드 신발과 옷에 집착을 했다. 십수 만원을 웃도는 피부관리를 시켜 달라며 엄마 앞에서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보경이 동생과 가장 많이 부딪쳤던 시기였지만 보경은 민혁이 밉지 않았다. 민혁은 엄마 아빠에게 주저않고 사랑한다 말할 수 있는 아이였다. 누나의 생일을 챙겨줄 줄 아는 아이였다. 짧은 손편지를 남길 줄도 아는 센스쟁이였다.



왜앵대던 소리가 서서히 민혁을 태운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직접 들었던 소리도 아닌데 생생히도 머리를 울렸다. 아파, 누나. 아파. 보경은 천장을 올려다봤다. 시야가 흐릿해지는 것 같았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침착. 침착해야지. 전혀 예상 못한 일은 아니었다. 보경이 레버를 돌려 버너 불을 껐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제 방으로 건너가 책상 밑에 둔 서큘레이터를 들고 나왔다. 감지기 아래 기기를 두고 코드를 꽂았다. 거실 베란다 창 쪽으로 머리를 돌려 작동시켰다. 툴툴거리는 소리를 타고 연기가 조금씩 밖으로 빠져나갔다. 수 초만에 경보음이 멎었다. 보경을 지켜보던 아빠가 안도했는지 의자를 다시 끌어와 앉았다.


-야, 이거 진작 이렇게 해 놓고 먹을 걸 그랬다.


합을 맞춘 것처럼 모녀가 남자를 동시에 쏘아봤다. 보경 아빠는 이번에야말로 풀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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