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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흔적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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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멋대로 Oct 27. 2024

흔적 (0-1)

0-1.


-오, 안녕. 나아는, 그냥, 있었지. 넌 뭐해.


용찬의 말이 이상하게 늘어졌다. 보경은 나도 그냥, 하면서 다가와 벤치에 앉았다. 선 채로 잠시 주춤하다 용찬은 다시 엉덩이를 붙였다. 보경 모르게 눈알을 좌우로 살짝 굴렸다. 둘은 전혀 가깝지 않은 같은 과 동기였다. 이번 학기에 수업 세 과목이 겹쳐서 마주치면 인사를 하는 정도에 그쳤다. 나란히 앉은 적도, 따로 밥을 먹어 본 일도 없었다. 신입생 시절에는 무리에 섞여서 가끔 용찬이 보경에게 농담을 건네기도 했지만 한참 된 이야기였다. 용찬은 군 복무를 마치고 지지난 학기에 복학했다. 보경이 세 학기를 연달아 쉬고 이번 학기에 돌아왔다는 얘기를 용찬은 다른 동기에게 들었다. 이 년 만의 만남이었다. 보경은 잔디밭을 내려다보면서 머리를 쓸어넘겼다. 여전히 차분한 애네, 용찬이 생각했다. 자신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둘 사이에 꺼내 놓을 별다른 추억이나 이야깃거리가 없었다. 용찬은 할 말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등에서 땀이 조금씩 배어나오려는 기미를 느꼈다. 대충 나오는 대로 말을 내뱉어 버렸다.


-점심, 은, 먹었어?


-아니 나는 아직.


-그럼 학식 갈래? 금방 수업인데 밥 먹어야 될 거 아냐.


-너 방금 빵 먹은 거 아니야?


보경이 용찬의 손에 들린 빵 봉지를 보면서 말했다. 용찬은 아차 싶었다. 이런 걸로 배 안 찬다고 금방 둘러댔다. 보경이 자기는 별로 생각 없다면서 용찬에게 뭔가 더 먹을 생각인지 물었다. 그렇다면 자신도 따라 가겠다고 했다. 용찬은 아니 그럼 뭐 그냥 가지 말자, 하고선 고개를 내려깔았다. 입안을 혀로 한 번 더 꼼꼼히 훑었다. 허벅지를 괜히 주먹으로 콩콩 두드렸다. 자연스러워 보이고 싶어 하는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보경이 어떻게 볼 지 신경쓰였다. 동기들이 익히 아는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꺼내어 보여야 했다. 그것이 자신에 따르는 유일한 기대였다. 보경은 말 없이 계속해서 잔디밭을 내려다봤다. 용찬이 별안간 기지개를 켰다. 야아아, 날씨 기가 막히네. 진짜 봄이다 봄. 쥐어짜낸 너스레에 보경이 싱긋 웃었다.


-그러게.


용찬은 여유를 약간 찾았다. 수업 듣기 진짜 싫다 그치. 봄이라서 그런지 나른하네. 뻔한 소리를 또 한 차례 나열했다. 보경이 천천히 고개를 크게 세 번 끄덕였다. 아랫입술을 위로 바짝 끌어당긴 표정을 했다. 보조개가 패였다. 저런 소녀 같은 표정을 할 줄도 아네, 용찬이 속으로 생각했다. 옆구리까지 떨어지는 보경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풀댔다. 보경이 왼손을 머리 뒤로 넘기더니 오른쪽 옆머리를 쓸어당겼다. 선듯한 향이 용찬의 코에 닿았다. 용찬은 할아버지 같은 소리로 괜히 과장되게 목을 에흠 에흠 가다듬었다.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도통 꺼낼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열 손가락을 허벅지 위에서 까딱거리다가 에라, 하고 용찬은 생각을 놓았다. 그냥 관두기로 했다. 보경을 따라 아랫입술을 올려붙였다. 코로 숨을 크게 흘려보내면서 철수세미를 내려다봤다. 보경은 운동화를 벗었다. 양반다리를 하더니 교차된 발목 위에 두 손을 포갰다. 어색한 기색 하나 없이 여유를 부렸다. 용찬은 알 수 없이 근질거리는 기운을 꾹 눌렀다. 다리라도 크게 달달 떨고 싶었다. 대신 양 무릎 위에 손을 하나씩 올려 두고 느린 박자로 허벅지를 두드렸다 쓸었다 했다. 정적과 부산 사이 시간이 조용하게 흘렀다. 고여버린 주변의 산소를 다 소비하여 용찬이 머릿속에서 허우적대기 시작할 무렵 보경이 입을 열었다.


-날이 괜찮기는 한데.


-엉?


-비 왔으면 좋겠다.


나도, 나도. 용찬은 이렇게 호들갑을 떨려다 참았다. 대신 보경의 시선을 좇았다. 차분하게 고개를 들었다. 폭신해 보이는 흰 구름을 바라봤다. 구름이 습기를 머금고 세를 불리기 시작해 우중충하게 하늘을 뒤덮는 상상을 했다. 비가 내린다. 콧잔등과 정수리에 톡 톡 한두 방울로 마중나와 비는 잿빛 아스팔트를 점묘법으로 까맣게 찍어낼 것이다. 햇빛에 바싹 마른 색을 진하고 무겁게 만들 것이다. 과장하고 확대할 것이다. 화창한 햇살 아래 증발해 버릴 것 같은 여린 존재감을 비는 붙들어 줄 것이다.


용찬은 흠뻑 젖고 싶었다. 비는 용찬의 오랜 테마였다. 꼬마 때부터 유난스러웠다. 비는 하늘이 부리는 마법 같았다. 비릿한 흙 냄새를 바람이 실어 오면 오금이 저릿하고 오줌보가 간질거렸다. 우비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밖으로 나섰다. 비가 오면 거리가 비었다. 빈 거리를 신이 나서 내달렸다. 또 우산을 쓰고 이리저리 걸었다. 햇빛은 세상을 너무 빤하게 비췄다. 우산은 저 한 명분의 방공호였다. 비가 오면 사람들은 비를 신경쓰기에 바빴다. 우산 아래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비는 용찬을 용찬답게 만들었다. 비 속에서는 애쓰지 않아도 되었다. 선택을 하는 순간에 비가 왔으면 좋겠다고 용찬은 유서에까지 써 두었다.


보경은 흘러가는 구름 조각을 계속해서 눈으로 좇았다. 화창한 하늘을 보면서 비를 떠올리는 사람이 또 있을 줄 용찬은 몰랐다. 나는 비 오는 날이 차라리 좋아, 보경이 말했다. 맑은 날은 누군가와 같이 누려야 하는 날씨 같다고 했다. 보통 혼자 다니니까 날이 맑을 땐 왠지 외로워진다고 했다. 비 오면 근데 혼자여도 아무 문제 없잖아. 오히려 더 편하지, 보경이 말을 맺자 용찬이 물었다.


-그래도 비 막 맞는 건 안 좋을거 아냐.


뭐 어때, 보경이 대답했다.


-젖을 각오 돼 있으면 뭐. 젖어도 말리면 그만이고. 한국 사람들은 비 좀 맞으면 죽는 줄 안다니까.


사람들이 해가 쨍쨍하면 날 좋다 하고 흐리거나 눈비 올 때는 날이 궂다 나쁘다 표현하는 것도 보경은 별로 공감이 안 된다 했다. 다수 취향 소수 취향으로 갈릴 수는 있지. 그래도 날씨에 옳고 그른 게 어딨겠어. 보경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용찬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뭉게구름이 해를 조금씩 가렸다. 둘만의 음영 속에서 보경은 비에 대하여 잔잔한 생각을 뿌렸다. 용찬은 주변이 슬슬 낯설게 보였다. 시공간의 좌표와 기울기에 생긴 미묘한 변화를 감지했다. 보경이 내뱉는 음절마다 용찬은 고장난 모니터 화면처럼 이리저리 휘어졌다. 보경의 잔잔한 주파수가 용찬을 너울거리게 만들었다. 


-맞어.


공명의 진폭을 용찬은 턱끝으로 그려냈다.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냥 벌어지는 현상인 거지. 좋고 나쁜 건 없어. 속으로 생각했다. 멍한 얼굴로 되돌아갔다. 무겁게 매달았던 표정을 내려놓았다. 재치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부담을 완전히 거둬들였다. 옆 사람을 건드리고 상황을 뒤틀고 말장난을 치고 과장을 섞고 엉뚱한 행동으로 상대에게서 헛웃음이나마 끌어내야 한다는 오랜 강박. 용찬이 눈을 꽈악 감았다가 떴다. 여러 차례 눈을 깜빡였다. 흐트러진 초점을 다시 잡았다.


-나는, 너 볼 때마다 진지한 애 같았어.


-그래? 용케 알아챘네.


용찬의 대답에 둘은 잠깐 웃었다. 벤치에 앉은 뒤로 처음 서로 눈길이 마주쳤다. 용찬은 금방 고개를 돌렸다. 보경은 자신을 꿰뚫고 있었다. 정문 분식집에서 파는 새우튀김처럼 과장된 몸집 안의 옹송그린 알맹이가 창피해졌다. 그러다가도 튀김옷 속의 새우가 부끄러워할 필요가 뭐 있나 싶었다. 세상에 낚여 한 몸 내주었더니 놈들이 냅다 튀겨 낸 것이다. 몸집을 부풀리도록 만든 것이다. 그래야 세상에 팔린다 꾀면서. 공갈 새우튀김이나 크림이 부족한 크림빵이나 매한가지다. 인간성 함유량 딸리는 인간은 조금 다른 영역인데, 우선 인간성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필요하겠다 생각할 때 보경이 끼어들었다.


-너도 속 시끄러운 타입이구나.


용찬은 대답 대신 보경처럼 미소지었다. 유용한 표정을 배운 김에 바로 써먹었다. 어디서나 말과 행동을 주저없이 행하는 사람을 용찬은 일평생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은 남 앞에서 몸짓 하나하나가 신경쓰였다. 지금 상황에 적절한 말인지 꼭 맞는 행동인지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고 확인하느라 바빴다. 교양 수업 조모임에서는 용찬을 진지한 사람이라고 했다. 반나절짜리 봉사 활동을 같이 했던 사람들은 입 다문 용찬더러 과묵하시네요, 하고 웃었다. 조용한 사람이라는 수식이 용찬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재미 없는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용찬의 엄마가 어린 용찬을 데리고 나가서 누군가에게 보일 때마다 꼭 선수쳐서 했던 말처럼 싫었다. 얘가 원체 숫기가 없는 편이야, 응.


용찬은 엉뚱한 행동을 좋아했다. 적당한 시간으로 벽을 허문 또래 친구 앞에서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곧잘 보였다. 괴성을 질렀다. 의미를 가늠하기 어려운 춤을 췄다. 상식과 맥락에서 벗어난 농담은 혼란스러운 머리를 식히는 유일한 방편이었다. 삶은 멈추지 않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 생각할 거리를 얹어 끊임없이 퍼날랐다. 모든 사고를 처리할 수는 없었다. 객기 부렸다가는 생각에 깔려 죽기 딱 좋았다. 그러느니 멋쩍게 웃어 버리는게 최선이었다. 웃거나 웃음을 팔거나 둘 중 하나가 주효했다. 미친 놈 소리가 좋았다. 또라이라는 훈장을 받기 위해 온갖 '쇼'를 했다. 나라는 존재에 적당히 구멍을 내어 얼 빠진 모습을 보여 주면 주변은 용찬을 재미 없게 보지 않았다. 하지만 용찬은 자신이 낸 구멍에 몇 번이고 빨려들어갔다. 새까만 어둠에 먹혀버렸다. 간신히 기어올라오고 나서도 다시 위태로운 춤을 추었다. 용찬은 스스로 낸 구멍과 세상이 모두 무서웠다.




-생각보다 생각이 좀 많지 내가.


보경이 또 빙긋 웃었다. 보경은 양반 같았다. 서두르지 않았다. 용찬은 여태 보경을 제대로 못 봐 왔다고 생각했다. 보경이 끄응, 하면서 깍지 낀 두 손을 앞으로 뒤집어 뻗었다.


-생각 많은 건 괜찮은데, 그걸 다들 숨기고 사는 게 문제지.


보경이 혼잣말처럼 힘을 빼고 말했다. 잔디가 젖었다. 보경이 용찬에게 촉촉하게 내렸다. 용찬도 젖었다. 눈을 감고 빗소리를 들었다. 용찬은 수업을 듣기 정말로 싫어졌다.


-근데 내가 뭐 좀 찾던 게 있거든.


-뭘?


-그냥 뭐 적어둔 종이 쪼가린데. 없어졌어.


용찬이 어제오늘 자신의 여정을 간략히 풀었다. 보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뒤로 숨은 해가 하얗던 구름떼를 회색으로 물들였다. 비 대신 빛을 품은 먹구름이라. 용찬이 곁눈으로 시계를 봤다. 강의 시작까지 오 분 남았다. 보경이 시간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자마자 보경은 신발을 신었다. 일어나 날개뼈를 가볍게 뒤로 모으면서 한번 더 끙차 소리를 냈다. 이번엔 용찬이 슬며시 웃었다.


-가자 얼른.


-어딜?


-어디기는.


보경이 앞장섰다. 가방을 둘러메고 용찬이 보경의 뒤를 따랐다. 언덕을 내려가 용찬은 잔디밭을 돌아봤다. 루비 색 사탕 껍질은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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