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하여 알고 이해하고 싶어서 가장 많이 탐구했던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어떻게 주는 것이고 받는 것인지 알고 싶었고 사랑의 근원적 마음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이며 어떻게 사랑을 느끼고 어떤 감정일지 알고 싶었다. 사랑의 글과 표현이 가장 많이 담긴 책이라면 성경일 것이다. 성경에서도 믿음 소망 사랑 중 그중 제일은 사랑이라고도 한다. 왜 사랑이 제일이고 강조하며 가르칠까? 점점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작가 알랭 드 보통의 첫 소설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를 읽기 시작했고 사랑에 관하여 점점 이해해보려고 했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며, 그 관심으로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 스스로 더 풍부하게 느끼게 해 준다는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너의 재치나 재능이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네가 너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너의 눈 색깔이나 다리의 길이나 수표책의 두께 때문이 아니라 네 영혼의 깊은 곳의 너 자신 때문이다.”
“나는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애초에 내가 클로이를 선택한 것은 그녀의 웃음이라던가 그녀의 정신의 활기 때문이 아니었다. 내 삶의 심술궂은 캐스팅 감독인 무의식이 그녀에게서 필요한 양의 고통을 준 뒤에 무대를 떠나는데 적합한 인물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한 남자가 클로이라는 여성을 우연히 만나 1년 간 런던에서 연인으로서 함께하다가 결국 헤어지는 과정을 그린다. 그 1년 간의 연인으로서의 시간과 소설이 흠뻑 빠져들도록 초대한다. 그 남자가 클로이가 함께 한 시간과 나눈 사랑으로 사랑에 관하여 이해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된 구절이다.
사랑은 결국 차지하는 것 같다. 무의식이 인간의 많은 영역을 차지하고 지배하는 것처럼 사랑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지배하고 많은 것을 차지하는 것 같다. 아니 그렇다.
그렇다. 사랑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었다. 무의식이라는 큰 카테코리 안에서 사랑이라는 카테코리가 발동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랑은 이해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은 그냥 하는 것이었다. 애초 사랑은 ‘왜?’라는 질문을 던질 수 없는 너무나 크고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랑에 관한 왜라는 질문의 답은 ‘그냥’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하고 있다. 그렇기에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