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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무솔 Oct 16. 2019

자유주의자의 음식, 순대




날카로운 첫 순대의 추억


썰어놓은 순대의 외견은 일반 간식과 다를 바가 없다. 아니 오히려 불량식품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아무런 영양가 없어 보이는 당면으로 가득 찬 정체불명의 껍질은 맛보기 전까지 큰 기대를 품게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 조각 씹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혀에 착착 감기는 당면의 쫄깃함과 껍질의 탄력은 이것이 스낵류가 아닌 음식의 한 종류임을 본능적으로 알게 한다.


어린 시절의 나는 이러한 순대의 독특한 식감에 일찍이 감탄했다. 소풍 갈 때나 먹을 수 있었던 김밥만큼이나 순대를 좋아했다. 순대에 비하면, 떡볶이 같은 것은 요사스러운 간식거리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러나 순대를 그토록 좋아했으면서도 나는 순대의 본질을 알지는 못했다.


어느 날 분식집에서 썰리지 않은 기다란 순대를 보고 순대가 돼지의 창자로 만들어졌으며, 그 창자를 다 비운 후에는 돼지의 피와 함께 당면을 집어넣는다는 사실을 듣게 됐을 때, 나는 비로소 순대의 진짜 모습을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먹었던 순대가 이렇게 엄청난 비밀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약간의 역겨움과 묘한 신비감, 그리고 뭔가 어른이 된 것 같다는 으쓱한 기분을 선사해 주었다. 나는 얼마간 고뇌에 빠졌지만, 이내 다시 순대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순대는 원하는 만큼 먹기가 어려운 간식이었다. 분식집의 상징과도 같은 떡볶이와 달리 순대는  늘 객식구와 같은 취급을 받기 마련이어서 학교 주변에는 아예 팔 질 않았고, 읍내에나 가야 겨우 한 군데 순대를 사 먹을 수 있는 곳이 있었다. 그마저도 항상 사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주머니의 컨디션이나 기분에 따라 순대를 찌지 않는 날이 부지기수였으며, 떡볶이가 떨어지면 아주머니가 미안해하며 장사를 접지만, 순대가 떨어지면 나 혼자 머쓱해질 뿐이었다.


떡볶이는 주 고객인 학생들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여 종이컵에 담아 3백원에도 팔고 5백원에도 팔지만, 순대는 기본이 2천원어치부터 시작한다. 순대를 천원어치만 달라고 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상황을 읽는 능력을 갖춰야만 하는 일이었다. 마침 아주머니의 기분이 좋고 순대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만이, 2천원어치 같은 천원어치의 순대를 먹을 수 있었다. 둘 중 하나만 조건이 맞지 않아도 천원어치의 순대를 먹기 힘들었다. 뜨거운 찜기에서 순대를 꺼내 칼질을 스무 번 남짓 하는 노동의 대가로 천원은 아무래도 부족하다는 경제학의 원리, 노동법의 원리를 나는 순대로부터 배웠다.


순대는 좋은 선생님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제 간식거리죠 ⓒ2019 gumoosol


늘 순대를 먹고 싶은 나와 다르게 친구들에게 순대는 철저히 옵션에 불과했기에 나는 친구들보다는 어머니를 졸라 순대를 사 먹곤 했다. 큰 맘먹고 시켜야 하는 통닭에 비하면 순대는 조르는 입장에서도 부담이 없는 편이었다. 어머니 지갑에 그래도 2천원은 넉넉히 있으리라는 믿음이 어리광을 부리게 했다. 어머니는 항상 순대에 간을 조금 섞어달라고 하셨는데, 어린 입맛에는 이것이 영 불만이었지만 별다른 토를 달지는 않았다. 대부분 아버지와 나에게 자신의 생활과 성격을 맞추는 어머니가 전적으로 자신만을 위한 기호를 드러내는 유일한 순간. 그 작은 틈까지 메워버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순대라면 냄새조차 싫어하시던 아버지가 집을 비우실 때면, 그렇게 나는 어머니와 간이 섞인 순대를 먹었다. 순대와 간 몇 조각이 나를 철들게 한 셈이다.




자유주의자의 음식, 순대


순대를 먹는다는 것은 끊임없는 선택의 결과물이다. 유년시절의 친구들이나 아버지처럼, 순대는 먼저 자신을 먹을 것인지 먹지 않을 것인지를 선택하게 한다. 그다음은 어머니처럼 간과 같은 부속을 넣을 것인지 말 것인지도 결정하게 만든다. 나는 부속을 대부분 좋아하지만, 귀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귀뼈의 물렁한 식감이 어딘가 징그럽기 때문이다. 이 극도로 주관적이고 개인의 자유에 속하는 영역이어서, 왜 귀보다 훨씬 징그러운 허파나 염통, 심지어 돼지 족발은 잘도 먹으면서 귀는 못 먹느냐고 하면 딱히 반박할 말은 없다. 그저 레스토랑에서 고기의 굽기를 미디엄 레어로 선택하거나,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으니 새우는 빼 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는 귀를 빼 달라고 말할 뿐이다.


순대와 부속까지 섭렵하는 단계가 되면 보다 심도 있는 선택을 해야 한다. 내가 자란 경인권의 분식집에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꽃소금(소금에 고춧가루를 소량 넣은 것)을 내주었기에 나는 한치의 의심도 품지 않고 근 20년간 순대를 꽃소금에 찍어 먹었다. 그러나 갓 스무 살이 되어 경북 포항의 한 분식집에서 꽃소금 대신 막장을 마주한 것은, 지금까지도 그 가게의 모든 풍경이 생각날 정도의 생경한 파격이었다. 감자튀김에 토마토 케첩을 찍듯 당연하게 여겨졌던 순대와 꽃소금의 견고한 상관관계가 순식간에 무너질 만큼 막장은 맛있었다. 꽃소금은 순대가 가진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에 불과했던 것이다.


막장을 찍으면 이 단순해 보이는 순대가 마법을 부린다


순대를 찍어먹는 양념이 전국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것보다 조금 더 뒤였다. 전라도에서는 초장을, 제주도에서는 간장을 주로 찍어 먹는다. 심지어 새우젓을 곁들이는 곳도 있다. 이 정도로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음식은 흔치 않다. 탕수육이 고작 부어먹냐, 찍어먹냐로 당파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순대는 차원이 다른 선택의 자유를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꽃소금을 벗어나 막장에 순대를 찍는 순간, 편협한 줄도 모른 채 살아왔던 미각의 당연함은 부서진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인간은 분명히 다른 존재가 된다.




그리고 순대국밥을 만나다


이후 나의 순대력(力)은 가파르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막장에 새우젓, 양파를 종횡무진 곁들이는 것을 물론, 순대볶음과 순대 꼬치, 순대 강정과 같은 별식을 즐기기도 했다. 병천순대, 백암순대, 진천 순대와 같은 고급 순대를 두루 맛보았음은 물론이다. 다양한 형태의 순대를 즐기게 되면서 자연스레 접하게 된 음식이 있었다. 바로 순대와는 또 다른 독립된 요리로 보아도 좋아도 될 음식, 순대국밥이었다.


순대국밥은 단순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설렁탕처럼 배경을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 감자탕 같이 재료를 둘러싼 논쟁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또 해장국처럼 특정한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며, 곰탕 같이 조리시간을 추측하게 되는 모호함도 없다. 순대가 들어갔으면 순대국밥인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돼지 부속이 들어간 국밥에 불과하다. 이처럼 명료하고 깔끔한 이름은 소머리국밥의 그것에 비견될만하다.


그러나 한 개인이 순대국밥을 먹는 결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전국 어딜 가도 하나씩은 있을 정도로 대중적인 음식임에도, 끼니때마다 찾는 이가 있는가 하면 듣기만 해도 질색하는 사람도 많다. 완성된 음식으로 인식되는 순대를 국에 말아먹는다는 이질감이 큰 까닭이다. 순대를 비롯해 나와 식성이 거의 비슷한 어머니도 순대국밥만큼은 이상하다는 이유로 드시질 않는다. 나 역시 처음 순대국밥을 접했을 때는 괴식을 바라보듯 했다. 순대도 맛있고, 국밥도 맛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굳이 말아먹을 필요가 있는가. 마치 라멘에 초밥을 말아먹는 것과 같았다.


순대국밥이 주는 '아재' 이미지도 큰 진입장벽 중 하나이다. 왜 순대국밥을 좋아하면 한없이 아재에 가까운 느낌이 드는가. 왜 대부분의 아재들은 실제로 순대국밥을 좋아해서 괜히 먹을 때마다 신경 쓰이게 만드는가. 고작 국밥 한 그릇이 이런 의문을 품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기묘하다.






나는 이질감과 아재라는 오해(?)를 무릅쓰고 이번에도 순대국밥을 먹는 쪽을 선택했다. 국물에 적셔지고 으깨지는 순대의 모습은 여전히 낯설었지만 또 다른 파격이었다. 간을 먹지 않았던, 꽃소금만 찍어먹던 나에게 순대는 여러 번의 신세계를 경험하게 했고, 마침내 순대국밥으로 순대의 또 다른 스테이지를 열어 주었다.


구수한 국물에 순대와 갖가지 부속들을 적셔서 고소한 들깨 한 숟갈을 넣고 음미하는 일은 순대의 지위를 단순한 먹거리에서 한 끼 식사로 격상시킨다. 어린 시절 분식집에서 눈치를 봐가며 먹던 순대가 어느새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는 든든한 식사로 탈바꿈하는 순간은 어른이 되기에 충분한 장면이다. 수많은 국밥 중에서도 유독 순대국밥이 어른을 넘어 '아재'의 상징이 된 이유이다. 순대국밥을 먹는 순간부터 순대는 더 이상 간식거리가 아닌 어른의 한끼 식사가 된다.


순대국밥 : 순대는 적셔짐으로 인해 도약한다


순대국밥의 또 다른 매력은 혼밥에 있다. 대부분의 국밥 중에서도 순대국밥에는 범접할 수 없는 혼밥의 기운이 있다. 혼자 왔다는 사실, 추가 메뉴 주문에 대한 부담, 자리가 없지 않을까 하는 초조함은 이미 국물에 녹아 없어진 지 오래다. 창자부터 염통까지  생물의 모든 자취가 뒤섞여 있는 모습은 그것을 먹는 이에게 약간의 명상을 제공한다. 이렇게까지 먹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렇게 먹으니까 너무 맛있다는 본능이 공존다. 오히려 여럿이 왁자지껄 어울려 머리 고기까지 거나하게 먹고나버리면 순대국밥의 맛은 현저히 떨어진다. 맛에 대한 놀라움을 배제한 채 그야말로 식사(食事)만을 치르게 되는 것이다. 홀로 먹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그 내밀한 맛이 순대국밥을 제일가는 혼자의 음식으로 만든다.




순대 밖의 순대를 기다리며


순대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같은 순대국밥 안에서도 구수한 사골국물을 베이스로 하는 전형적인 방식이 있는가 하면 다진 양념 등을 넣고 매콤 짭지름 하게 끓이는 방식이 있다. 아예 순대국밥을 넘어 선지 해장국과 내장탕 등 더 매니악한 장르로 외연을 확장해 나갈 여지도 있다. 물론 모든 선택이 언제나 좋을 수는 없다. 초장을 순대에 찍어먹는 것이나 연변 순대, 그리고 막창순대로 만든 순대국밥은 내 취향은 아니었기에, 나는 귀를 먹지 않는 것과 유사하게 이들을 정중히 사양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 순대를 간장에 찍어 먹어보지 않았으며, 명태순대와 아바이순대, 그리고 오징어순대를 먹어보지 않았다. 좀 더 글로벌하게는 스코틀랜드식 순대인 해기스와 터키식 순대인 돌마를 아직 먹어보지 못했다. 아마 죽기 전까지 이 세상의 모든 순대를 경험하지는 못하겠지만, 이것들을 경험할 시간이 아직 많다는 것과 보여줄 맛의 스펙트럼을 쉽사리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이 순대가 주는 즐거움이다.


순대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혹은 자신만의 순대에 갇혀 있는 사람이라면, 조금 더 과감해질 것을 추천한다. 생각지 않았던 커다란 자유가 순대에 있다. [끝]거무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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