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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무솔 Nov 18. 2018

우리가 다이어리에 집착하는 이유

2019년 다이어리를 고르며


MBTI 검사를 하면 언제나 마지막 항목에서 소위 판단형(Judging)인 J가 나왔다. '질서정연한 것을 추구하고 계획 세우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옳아보였고, 나를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나는 언제나 '융통적이고 자유롭고 즉흥적인'인식형(Perceiving) P의 길을 걸어왔다. 종종 그럴 듯한 계획을 세웠지만 그 계획의 뒷페이지를 보는 일은 없었다. 이제는 MBTI 검사를 하면 당당하게도 극단적인 P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라는 나의 모습이 아닌 실재하는 나를 인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찬바람이 불어오고 이파리들이 떨어지면, 서점에 깔리기 시작하는 다이어리들이 다시금 나를 J의 길로 유혹한다. 그리곤 철가루가 자석에 끌리듯 자책감과 결심과 미련과 기대감 같은 것들이 덩어리가 되어 내면에 질문을 던진다.


"설마 2019년도 이따위로 살진 않겠지? 그건 끔찍하잖아."


사실 다이어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매년 12월이면 회사에서 업무용 다이어리가 2개가 나온다. 큰놈, 작은놈. 그리고 내가 제법 업무를 많이하는 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보통 8월이면 하나를 다 쓰게되어 큰놈 하나를 추가 분양받게 된다. 그러나 그 삭막한 디자인과 구성, 뭔가 회사에 도움이 되는 내용만을 적어야 할 것 같고 회의참석시에는 뭐라도 적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액세서리로 휴대해야 한다. 또 행여 어디 엄한 곳에 두고 가기라도 하면 그 알멩이가 모두 까발려져 하하하 김대리, 이게 뭐야 라고 놀림 받을 것만 같은 생각에 나의 비밀한 생각까지 적을 수는 없다. 때문에 업무용 다이어리는 나의 온전한 친구가 될 수 없다. 태생적 한계다.


디자인과 구성에서 오는 만족감은 표면적인 이유가 될 수 있다. 많은 제작사들이 다이어리를 그야말로 '쏟아'내고 각종 유머러스하고 감각적인 디자인들이 범람하고 있다. 카페들도 앞을 다투어 당연하다는 듯 여러 이벤트를 엮어 다이어리를 판매한다. 이 중 어떤 다이어리에 나의 2019년을 맡길 것인가 고민하는 것은 나름 즐거운 소일거리가 되곤 한다. 그러나 썩 마음에 드는 표지가 있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이들 다이어리에 큰 차별점이 있다고 보긴 어렵다. 고작해야 Daily/weekly/Monthly로 구성이 갈리는 정도. 결국, 디자인이나 구성 때문에 다이어리를 산다고 하는 것도 핵심이 될 수는 없다. 새롭고 예쁜 장난감을 사는 기분을 더해줄 뿐이다.


2019년이라고 안 쓰던 사람이 쓰던 사람이 될 이유도 없다. 그건 앞에서 실컷 이야기한 P가 뜬금없이 J로 전향할 것이라는 개연성 없는 바람에 불과하다. 이번엔 다르다고 해봤자 소용없다. 그럼 대체 왜 어차피 잘 안쓰게 될 걸 알면서도 새로운 다이어리에 그렇게 집착하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새하얀 것이 줄 수 있는 안도감 때문일 것이다.


2019년의 다이어리는 2018년, 혹은 그 이전의 거뭇한 것들에 대해 묻지 않는다. 기억할 필요도 없고, 수치스러울 일도 없다. 해를 넘겨 생각할만한 중요한 일들도 2019년의 시작에 차곡차곡 정리해 둘 수 있다. 나의 형편없는 지난날, 혹은 아쉬움 가득했던 현재에 대해 새로운 다이어리의 속지는 그저 새하얗게 나를 격려할 뿐이다. 한번 적어봐. 너가 하고 싶은, 되고 싶은, 쓰고 싶은 모든 것들을.


새하얀 종이가 주는 그 위로의 말을 듣고 있으면 어느새 귀신같이 힘이 난다. 연말까지 치이는 일과 가기 싫은 약속들, 자질구레한 신경점들이 산적해 있지만. 나는 이미 2019년에 살게 된다. 그래서 다이어리를 고르고, 첫 페이지를 적는다는 것은 어느새 내 맘에 들지 않는 형태로 굳어져 가버리는 내 모습. 서른을 훌쩍 넘겨 경로의존성을 강하게 띄고 있는 인생에게 다시 꿈을 불어넣는 일이 된다. 그 때 더 열심히 하지 않았던, 그 때 잘못된 선택을 했던 나에게 너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고맙게도 말을 해주는 것이다.


적지 않아도 좋다. 다만 마음에 꼭 드는 다이어리를 찾는 여행은 중단하지 말자. P에게 적어야 한다는 강박은 J로 탈바꿈하는 과정이 아니라. 이도저도 아니게 만드는 정체성 상실을 가져오기 쉽다. 오직 '자유롭고 즉흥적인' 아이디어들이 손님처럼 찾아올 때 그것들이 머물 수 있는 방 한 칸을 마련하듯 다이어리를 고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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