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취향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쏘뇨 Jun 17. 2024

수박과 여름 나기

수박의 계절, 여름

저번 주부터 습해지기 시작하더니 더위가 찾아왔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여름이라 이리저리 준비도 못한 채 더위를 온몸으로 받고 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땀이 많다. 한의원에 갔더니 토양인이라고 하던가, 보통 사람보다 위가 100배 뜨겁다 하였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차가운 물을 마셔도, 얼음을 과하게 깨 먹어도 탈이 나지 않는다. 차가운 음식을 먹으면 몸이 쌩쌩해져 누구보다 부지런히 움직인다. 그만큼 차가운 것이 없으면 몸에 탈이 나고 쉽게 피곤해진다. 체질이란 게 참 신기하다. 그래서인지 여름만 되면 자연스레 수박을 찾는다. 어렸을 때는 아빠에게 전화에 애교를 부리며 수박을 사 와 달라고 이야기했고, 직장인이 되어서는 퇴근길에 시장에 들러 내 머리만 한 수박을 산다.



여름 나기의 시작

큰 수박은 생각보다 무거워 손을 이리저리 번갈아가며 들어 겨우 집까지 들고 온다. 가격은 웬만한 과일보다  비싸 좋고 튼실한 수박을 한 번 사기도 부담스럽다. 옛 소설가는 수박을 사치품 중 으뜸이고 천사들의 음식이라고 까지 묘사하지 않았던가. 집에 들고 와서는 바로바로 썰어줘야 한다. 수분이 많아 금방 미지근해지고 크기가 커 냉장고에도 쉽사리 들어가지 않는다. 도마에 수박을 조심스레 올려놓고 식칼로 살짝 흠을 내본다. 칼로 한 번에 자를 수 없기에 생채기를 내놓은 후 손으로 반을 가른다. 빠지직 소리에 울퉁불퉁 조각나게 잘리지만 빨갛게 잘 익은 과육을 보면 여름이 왔다는 걸 실감한다.



서투른 애정 한 조각

중학생 때 아버지는 여름이 오면 항상 수박을 사 들고 퇴근하셨다. 밤늦게까지 일하셨기에 아들이 자는 동안 수박을 깍둑썰기로 잘라놓은 후 항상 주무셨다. 그렇게 잘라놓은 수박은 2-3일이면 다 먹고 사라졌는데 아빠는 수박을 다 먹을 때쯤 다시 사놓고 하셨다.


그때는 몰랐다. 그냥 학교 갔다 돌아와 혼자 소파에 앉아 수박을 먹는 것이 좋았다. 그 수박이 어디서 왔고 왜 한 입 크기로 잘려있는지도 모른 채 그냥 있으니 먹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수박은 아빠가 퇴근길에 사오는 치킨 같은 거였으며 아들을 위한 아버지의 사랑 표현이었다. 그땐 몰랐지만 이제야 알 것 같다. 늦은 퇴근길에도 큰 수박을 사들고 와 피곤함을 무릅쓰고 한 입 크기로 잘라 놓고 잠자리에 든 아버지의 마음을.



더하면 더할수록 맛있는 법

중학생 때부터 고수하는 수박 먹기 방법이 있다. 맛없는 수박은 동그랗고 움푹 파인 그릇에 담아 설탕을 뿌려 먹는 것이고 맛있는 수박은 반쯤 언 상태로 선풍기 앞에서 먹는 것이다. 반쯤 언 수박은 단짠 아이스크림과 같은 기묘한 반전 매력이 있다. 약간 설 얼은 표면을 볼을 싸하게 만들고 씹었을 때 나오는 과즙은 차가운 이온음료를 먹은 것처럼 여름 더위를 날려버린다. 선풍기 앞에서 차가운 수박을 먹을 때면 만사형통이다. 여름에 찌는 듯한 더위를 벗어나는 것만큼 좋은 게 어디 있을까. 그러니 반쯤 언 수박과 선풍기의 조합은 여름 나기에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이다.


잘라놓은 수박을 선풍기 앞에서 먹어치우고, 자두 두 개로 입가심을 하는 맛이란! 수박의 단맛과 자두의 단맛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수박이 수영장에서 깨무는 얼음설탕 같은
맛이라면, 자두는 계곡에서 쪽쪽 빠는 설탕젤리 같은 맛이다.

- 박연준, 『모월모일』, 문학동네



다른 나라, 같은 수박

베네수엘라에서 먹은 수박은 한국 수박과 다르다. 남미 지방이라 해가 잘 들어서인지는 몰라도 수박이 오이처럼 길쭉길쭉하게 생겼다. 당도는 한국수박보다 높지만 씨가 너무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수박을 먹는 건지 씨를 먹는지 헷갈릴 정도다. 베네수엘라는 항상 여름임에도 한국만큼 수박을 많이 찾진 않았다. 집에 있으면 먹는 정도였지만 수박이 커 집에 자주 사놓지도 않았다.


그래도 싱싱한 수박을 볼 수 있던 곳이 있었는데 우리 집 가까이에 있던 주말 과일 시장이었다. 다리 밑에서 주말마다 여는 자그마한 과일 시장이었는데 파파야부터 오렌지까지 다양한 과일을 팔았다. 8시쯤 걸어 나가 과일 시장을 갔다. 한 손에는 바나나, 다른 손에는 작은 수박을 사들고 매일 집에 돌아갔다. 그렇게 산 수박은 며칠 먹지 못했는데 날씨가 좋아 수박이 금방 익어 갈아 마셨다. 갈아 마시던 수박주스, 그때가 그립다.



엄마와 함께한 여름

작년 여름에도 어마어마하게 수박을 많이 먹었다. 여름 기간 동안 백수로 지낸 만큼 집에서 할 일이 없어 수박 먹고 자고를 반복했다. 마침내 어머니도 에콰도르에서 돌아오셔서 자주 함께 시장에 가 수박을 골랐다. 줄무늬가 뚜렷한 작은 수박도 사보고 줄기가 푸릇푸릇 살아있는 수박도 집으로 데리고 왔지만 매번 설탕같은 수박이 아닌 애매모호한 수박이었다.


당도 높은 수박 사기를 성공한 적도 있지만 실패하는 것이 부지기수었다. 이래서야 안 되겠는지 엄마와 거실에 앉아 수박 잘 고르기라는 영상을 찾아봤다. 엄마와 이리저리 3개의 영상을 보고 시장으로 나섰다. 영상에서 말하는 배꼽이 작고 줄무늬가 크고 뚜렷하며 하얀 가루가 나온 수박을 골랐다. 성공이었다. 연거푸 실패 후 성공한지라 엄마도 나도 꺌꺌 거리며 맛있게 수박을 먹었다. 수박 그 하나가 뭐라고 말이다.




이렇게 수박 하나도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수박을 먹는 것이 취향이 될 수 있을까 했지만 적어보니 수박이 애착과일이라는 걸 알았다. 이번 여름도 어김없이 수박을 사서 퇴근할까 한다. 올해 여름 수박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길까 그리고 이번에는 어떤 수박을 만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