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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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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leis Oct 25. 2023

베스트 프렌드

그녀의 눈은 이미 미소짓고 있었다
마치 자기가 왜 세상에 왔는지 안다는 듯이.




나 오늘 너희집에서 자두 돼? 친구가 묻는다. 나는 오랜만에 전화온 친구를 데리고 걷는 중이다.

그럼, 아빠한테 물어볼게. 된다고 하실거야.


혹시 나한테 4천원만 빌려줄래? 책을 하나 사야돼서.

책을? 니가? ㅎㅎ 너 많이 변했구나. 나는 4천원을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4천원은 책에 쓰이지 않았을 것 같다.


저녁 무렵, 우리는 아빠와 할머니의 환영을 받으며 집에 들어왔다. 친구뿐 아니라 나까지도 환영을 받는 느낌이었다. 집에 친구를 데려오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집에 방은 두 개. 어떤 시기였는지 방의 주인인 삼촌이 나가 있어서 우리는 작은방에서 놀다가 잤다. 그냥 웃고 떠들다가. 아침이 왔다. 잘 가. 그래. 또 연락할게.


희는 내가 6학년때 만난 친구이다. 나는 반장이었고 그녀는 그 반대선상에 있었다. 성적도 성격도 거리가 멀었다. 나는 앞자리에, 그녀는 늘 맨 뒷자리에서 혼자 빙글빙글 웃으며 앉아있었다. 내 주위엔 언제나 아이들이 모여있었는데 어느날 이후 나는 다른 아이들을 물리치고 대각선 방향의 끝에 앉은 그녀에게로만 직진했다. 아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희마저도 가끔 어떻게 우리가 친구가 됐냐고 신기해했다.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처음 어떻게 친해졌는지.


그녀는 욕을 잘했다. 나는 그게 재밌었고 곧 나의 입에도 욕이 붙었다. 우리는 어디에서든 욕을 했다. 학교에서도, 동네 공터에서도, 심지어 버스 안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좋아했다. 어느날 그녀가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아파트 반지하. 하나의 방을 장롱으로 가로막아 생긴 구석에 그녀의 이불이 놓여있다. 거기가 그녀의 방이다.


너 소주 먹어봤어?

아니. 맥주는 마셔봤지만.

그녀는 소주와 고들빼기 김치를 가져왔다.

고들빼기 알아?

응 그거 전라도 김치잖아. 집에서 먹어봤어.

소주랑 같이 먹으면 맛있다.

그녀가 소주를 반쯤 컵에 따른다. 맑은 액체. 입에 가져다대기도 전부터 화학약품 냄새가 난다. 웃 퉷퉤. 이런 걸 도대체 왜 먹냐. 나는 소줏잔을 돌려준다. 그녀는 빙글거리며 혼자 마신다. 나는 고들빼기 김치만 먹는다. 엄마가 음식 솜씨가 좋으시구나.


너 여자랑 자 봤어?

아니.

난 자 봤다. 친구랑. 여기서.

그래? 그녀가 나랑 자자고 하려는 것일까 문득 생각했지만 우리는 그런 사이가 될 수 없을 만큼 그냥 친구, 베스트 프렌드였다.

우리 아빠 진짜 우리아빠 아니야.

의붓아빠 그런건가..

그자식이 날 덮쳤어. 그말도 웃으면서 하는 그녀.

그랬어? 놀랍지 않았다. 집에도 비슷한 인간이 있다.

엄마한텐 얘기했어?

엄마? 말했지.

난 아무 판단도 들지 않았다. 그녀에 대해 알 수 있는 부분이 더 늘었다고만 생각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우리가 친구가 된 걸 좋아하셨다. 우리는 서로의 결핍된 부분을 채워주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해준 부추전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다. 얇고 투명하고 물같으면서 바삭했다. 걸핏하면 눈을 휘둥그레 뜨는 나를 보고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는 헛똑똑이라며 공부만 잘하면 뭐하냐며 놀렸다.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는 놀랍도록 닮았다. 언제나 웃음을 띠고 있었고 아주 작은 일에도 재밌어했다. 마치 자매처럼 낄낄거렸다. 그래도 그녀에겐 엄마가 있다. 그게 안심이 되었다.


우리를 하나로 이어주던 봄과 여름이 가고 있었다. 어느날 종례시간, 담임이 누군가 친구의 돈을 훔쳤다고 모두의 눈을 감게 했다. 훔친사람은 조용히 손을 들어. 십여분이 지나고 담임은 범인이 밝혀졌다며 그 사람만 남고 모두 가도 좋다고 했다. 다음날, 그거 나야. 그녀가 말해주었다. 정말 너야? 네가 훔쳤어? 아니, 내가 안 훔쳤어. 아무도 손을 안들길래. 누군가는 손을 들어야하잖아. 근데 담임새끼가 나한테 뭘했는지 알아?

뭘했는데? 아아.. 제발. 아니기를.

그새끼랑 나랑 둘만 있는데 그러는 거야. 다 비밀로 해줄테니까 자기가 원하는 거 하나만 들어달래.

뭔데?

양말벗고 지 책상에 발을 올리래. 그래서 올렸더니 내 발을 맛사지 하더라.


일년이나 지났을까. 우리는 중학생이 되었고 어느 가을날 그녀 어머니의 제안으로 황량한 지역 운동장에 놀러갔다. 우리는 빈 좌석 사이사이를 누볐다. 경치를 감상하던 그녀의 어머니는 싸온 도시락을 꺼냈다. 그녀는 이런 시간을 오랜만에 갖는다는 듯 우리가 먹는 동안에도 경치로 시선을 향했다. 그곳에는 아무리 봐도 별 것은 없었다. 땅바닥에 앉아 차가운 김밥을 먹으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뭔가 달라진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그들은 둘만 따로 나와 작은 가게를 차렸다. 그리고 근처 동네로 여러번 이사를 다녔다. 그녀들의 집은 항상 낮고 어둡고 따뜻한 동굴같았다.


같은 반이 아니었는데 중2까지만 해도 우리는 종종 만났던 것 같다.


고등학교때 집으로 마지막 전화가 왔다. 공중전화라고 했다. 나 희야, 잘 지내지?

응 잘 지내, 너는?

잘 지내지. 아직도 그 이층집에 살아?

응.

한번 놀러갈게.

나는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그녀에게서 소식이 없는 사이 이사와 전학을 했다. 전화번호가 바뀔거라고 알리지도 않은채.


나는 사람들의 기억이 배어있는 오랜 동네가 싫어져 이사에 찬성했었다.


그 후 그녀의 소식은 아무데서도 들리지 않았다.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이 거두어지고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던 날을 떠올렸다. 내 삶은 도대체 왜 이러냐. 그렇게 애를 썼는데. 그녀의 표정이 말하고 있었다. 내 위로도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고 그저 지켜보아야 했던 때. 며칠이 지나 다시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그녀는 얼마나 많은 순간들을 그렇게 삼켜버려야만 했을까. 머릿속에선 가끔 그녀가 모든 의지를 잃은 채 허탈한 표정으로 한쪽 팔을 올리고 누운 모습이 그려졌다.


이사하고 나서 내가 그녀에게 전화하려 했는지 알 수가 없다. 어디로 걸어야할지는 알고 있었을까.


그해 나에게 너무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하고 싶지만

그저 어떤 시절의 나와 선을 그은 것에 가까웠다.

나는 그렇게 그녀와의 줄을 놓아 버렸다.


지금은 나는 그녀가 성형도 하고, 최고로 멋진 옷을 입고, 멋진 헤어 스타일에, 비까번쩍한 차를 타며, 특유의 그 웃음을 흩날리면서 삶에서 성공한, 부유한 여성이 되어 어디선가 나를 떠올리는, 나를 만나서 그 모든 게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말해주는 그런 상상을 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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