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leis May 20. 2024

컵라면

수업을 마치고 그냥 집에 돌아가는 일은 아무래도 헛헛했다. 그녀는 친한 친구가 없었다. 대학에선 친한 친구라 할 만한 관계를 만들지 못했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없었다. 수업을 듣고, 점심을 먹거나 건너뛰고, 가끔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짧은 대화를 나누고 수업이 다 끝나 집에 갈 시간이 되면 근처 백화점 앞까지 걸어가 버스를 기다렸다가 차를 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고 아직 햇빛이 눈을 찌르는 한낮이다.   


대로변 백화점 앞 사람들은 분주하다. 그녀는 먼지섞인 희뿌연 대낮의 풍경을 피곤하게 느끼며 버스를 기다리다가 맘을 돌려 도서관에 들르기로 한다. 그가 도서관에 있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좀 편해진다. 어차피 수업 과제 때문에 책을 빌려야 하기도 했다. 재일 교포 작가의 희곡을 자료로 거기 나온 심상을 분석하여 제출해야 한다.


그녀는 물고기를 골랐다. 물고기.. 물고기라. 물고기가 어떤 상징을 가지고 있지. 그녀는 언젠가 그녀의 남자친구가 읽던 두꺼운 상징사전을 떠올린다. 남자친구는 이미 그녀와 같은 대학에서 졸업을 마친 상태고 학교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아직 직장을 잡지 못한 그는 공공도서관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한다. 만약 도서관에서 일할 수 있다면 문헌정보학과를 나온 그에게 그만한 천직은 없을 것이다. 그는 항상 말하곤 했다. 도서관에 가면 좋은 책들이 널렸는데 왜 책을 돈을 주고 사냐고. 그 말은 어찌보면 맞는 말이었지만 그는 어차피 마음껏 책을 살만한 금전적 여유도 없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말을 입밖에 내진 않았다. 돈이 있어도 그런 생각은 들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상징사전은 비교적 신간이었지만 아무도 빌려가지 않아 제자리에 있었다. 재밌어 보였다. 수업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그녀라도 문학에는 관심이 있었다. 이걸 읽으면 문학에 대해 좀 더 깊은 이해를 할 수 있는 건가. 그녀는 읽어보기도 전에 우쭐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남자친구는 잠시 자리를 비운건지 늘 있던 자리에 없다. 그녀가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는 동안 그가 언제나처럼 반가움과 권태로움을 동시에 띤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다. 권태로움.. 그것은 적어도 그녀가 알기로는 오랜 연인에겐 피할 수 없는 무엇이었다. 처음의 다정함과 이끌림은 퇴색하고 편안함과 뭔지 모를 권태가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되는 것. 그들은 오랜 연인이었다.   그가   온다.   또   그다.   여전히   그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다가오는 그에게 약간은 억지로 꾸민 웃음을 지어보였다.


‘오늘 내가 책 찾다가 누굴 만났는지 알아?’

이것은 새로운 소식이다. 도대체 누굴 만났길래 이 사람의 얼굴에 활기가 돌지. 그녀는 지금이 궁금해야 할 타이밍이라 생각해 물어본다.

‘누구 만났는데?’

‘나 고향에 있을 때 알았던 사람. 서울에 올라왔대. 지금은 아나운서로 채용돼서 방송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많이 변했더라.‘

그녀는 오직 그 사람이 여잔지 남자인지가 궁금할 뿐이다.

‘그래? 여자야 남자야?’

‘여자지. 예전에 같은 학교 다녔었는데. 많이 달라졌더라구. 서울 사람 다됐고. 이 근처에 자주 온다고 하데. 다음에 시간되면 만나서 술 한잔 하기로 했어. 너도 같이 가자구.‘


그는 연신 웃고 있다. 그녀는 이 사람의 속마음을 모르겠다. 상징사전처럼 이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단서는 없을까.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새로운 여자가 나타나서 즐거운 걸까. 아니면 내게 질투라도 유발하고 싶은 걸까. 그녀가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그는 평소와 달랐다.


그녀는 목이 늘어난 허름한 티셔츠와 무릎이 나온, 너무 오래 입어서 부들부들한 바랜 청바지 차림의 그를 새삼 쳐다보았다. 자유롭게 흩어진 머리. 약간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는 자세. 아나운서가 된 여자 지인이 이 사람을 어떤 시선으로 보았을까 잠시 상상했다.


그는 걸음걸이가 독특했다. 한강 다리 반대편에 있더라도 그가 건너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외모를 꾸미지도 않고 말수도 적었지만 얼굴만은 잘생겨서, 여자친구가 끊긴 적은 없었다.


그녀는 상징사전을 펼치고 물고기가 나온 부분을 찾았다. 물고기는 죽음을 상징한다고 쓰여 있었다. 죽음이라고? 어떤 면에선 이해가 가기도 했다. 물고기는 물속에 사는 동물이고 물밖으로 나오면 죽는다. 사람은 물 밖에 살고 물속에선 살 수 없다. 그러니 수면을 경계로 삶과 죽음이 나뉘고 그게 사람 입장에선 수면 아래가 죽음의 세계다. 거기서 잘 살아가는, 아니 거기서만 숨쉴 수 있는 물고기는 죽음이 삶인 존재고 따라서 죽음을 상징할 수도 있는 건가.


지금은 아무래도 좋다. 그녀는 약간의 긴장감을 느끼며 건성으로 책장을 뒤적였다. 방송을 한다고. 아마 예쁘겠지. 정장을 입고 머리를 세팅하고 화장도 진하게, 그리고 머리도 좋고 센스있을 거야. 키도 클거고. 돈도 잘 번다... 는 생각에 이르자 그녀는 아직 학생인 자신을 상기했다. 그녀도 그와 마찬가지로 문과 학생이었고 딱히 미래가 보장될만한 성적도 성격도 아니었다. 자격증이라든가 취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시를 쓰고 싶어했고 밥벌이로 단순한 노동을 하다가 저녁엔 글을 쓸 수 있는 직업을 원했다. 어쩌면 그 여자가 나보다 이 인간에게 필요한 존재가 아닐까. 그 여자가 원하기만 한다면 말이야.


남자친구는 이런 그녀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서 소설을 읽고 있다. 아무튼 책읽는 재능은 있는 사람이다.


그녀가 집중력이 떨어진 걸 눈치챘는지 그가 말한다.

‘밥 먹으러 갈까? 점심 먹었어?’

‘아니’

‘여기 밑에 구내식당으로 가자’


식당은 지하에 자리하고 있다. 축축한 기운과 냉기 속에서 테이블에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조용하다. 조리사들은 하얀 모자에 하얀 앞치마 차림으로 주문이 들어오면 조리를 시작한다.


‘밥을 먹을까, 라면을 먹을까? 만두?’ 그가 묻는다.

‘그냥 컵라면이나 먹자’


그들은 옆의 매점으로 가서 컵라면 두 개를 사 온 뒤 스텐 물통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아무도 없는 테이블에 앉았다. 그녀는 붙어있는 나무 젓가락을 두 개로 쪼개어 두고 그가 나무젓가락을 비비는 것을 지켜본다. 나무 젓가락을 부드럽게 하는 절차였다. 그는 항상 그렇게 했다.


그가 옆에 있는 신문을 집어들었다. 그녀는 아무말없이 컵라면이 다 되기를 기다렸다가 뚜껑을 열었다. 그런데 뭘 잘못했는지 컵라면은 테이블에 엎어지고 내용물이 그대로 그녀의 허벅지로 쏟아졌다. 앗 뜨거워. 반사적으로 일어서면서 지른 그녀의 외마디소리에 밥먹던 사람들이 돌아보았다. 그녀의 청바지를 타고 뜨거운 국물과 면다발이 흘러내렸다. 치마를 입었다면 나았을까.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살짝씩 뛰며 다리에 붙은 젖은 바지를 손으로 펄럭였다. 순간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들에게도 다 들릴 정도로 아주 크게.


아하하하하 아하하하하... 그는 숨이 넘어가게 웃고 있었다. 악의는 없었지만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언뜻 통쾌해하는 표정이 비친 것도 같았다. 바지에 뜨거운 기운이 조금 식어서 그녀는 행동을 잠시 멈추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하하하하 아하하하하... 아.. 미안해, 웃으면 안 되는 건 아는데, 네가 그러고 있는 걸 보니 참을 수 없이 웃겨서.. ’ 그는 그녀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도 한참을 더 웃었다. 그는 엎어진 컵라면을 세우고 휴지를 가져와 주위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가 가져온 휴지로 바지를 닦았다. 그녀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꼭 그를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녀의 발 밑에 라면 조각들이 마치 어항 속에서 탈출한 물고기들처럼 흩어져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불행의 냄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