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leis Jun 19. 2024

카세트 테이프

고교시절 학급에 말 같은 아이가 있었다. 그녀는 활달하고 운동 신경이 좋았으며 친구들과 장난칠 때는 자주 겅중겅중 뛰어 친구의 등에 매달리곤 했다. 나는 그녀가 등에 매달린 친구들 중 한 명이다.


그녀 - h라고 하자 - 와 나는 짝이었다. 우리는 키가 커서 뒤에 앉았는데 어느 날 담임이 키가 크다고 해서 뒤에 앉는 것은 불공평하다며 일주일마다 전체적으로 한 줄씩 앞으로 이동하게 했다. 자동적으로 맨 앞에 앉아있던 아이들은 맨 뒤로 가고 맨 뒤에 있던 아이들은 몇 주가 지나면 앞으로 가게 되어있다.


아직도 h와 내가 맨 뒤에 앉아있던 시절, 그러니까 학기 초의 일이다.


쉬는 시간, 화장실에 간다고 했던 h가 평소와 달리 약간 상기된 얼굴로 돌아와 자리에 털썩 앉는다. 숨소리도 거칠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러나 싶어 쳐다보니 그녀의 시선은 나를 비스듬히 지나 옆 분단에, 역시 어딘가로부터 돌아와 막 자리에 앉으려는 아이를 향해 있다. 그 아이로 말하자면 학기 초에 나눠주는 비상연락망을 받은 그날 당일 나의 집에 전화한 아이다. 나 말고도 전화를 받은 애들이 수두룩했다. 연락망을 보고 차례로 전화해보고 있다면서 별 말도 없이 끊었다. 반장선거라도 나오려고 그러나 했지만 담임에 의해 반장후보로 지명되었을 때도 관심이 없다고 사양했다.


그런 그 아이가 앉자마자 갑자기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내 옆에 앉은 h를 유심히 마주 쳐다본다. 흐리멍덩한 눈으로도 유심히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틈만 나면 책상에 엎드려 자던 아이인데 웬일로 자지 않고 있다. 나도 내 옆의 h도 그 아일 바라보고 있지만 그 아이의 시선은 h에게만 가 있다가 눈싸움에서 지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앞을 향해 앉는다. 책상 위에 두 팔을 놓고 고개를 약간 떨군 채 뭔가 생각하는 듯하다.


그리고 몇 주가 지나 h와 나는 맨 앞줄로 가게 되었다. 나와 h, 그 밖의 우리 패거리들은 쉬는 시간마다 교실 앞쪽 공간을 온통 차지하며 떠들썩하게 놀았다. 모두에게 전화를 돌리던 그 아이 - p라고 하자. p는 갈수록 말이 없어졌다. 그녀가 같이 다니는 무리들은 수다스럽고 명랑했으나 p는 - 그녀는 칙칙했다.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하지만 그녀는 가끔 아이들에게 편지를 썼다. 일종의 통신인 셈이다. 다른 세계로의 통신.


p가 h에게도 종종 편지를 보내는 것을 보고 내가 p에게 먼저 편지를 썼다. p에게 도대체 뭐가 있는지 알고 싶었다. 왜냐면 말처럼 날뛰는 h도 - 속에 무슨 괴물이라도 한 마리 들어있나 싶게 까부는 그녀도 p만 보면 조용해졌기 때문이다. 그럴 때의 h는 바람이 없는 날 어느 해변, 햇빛은 따뜻하고 모래알은 반짝이고 눈 시리게 파란 바닷물도 빛나는데 그것에 대해 정작 할 게 없어 멍하니 바라보는 사람 같았다. 그 외에도 아무튼 여러모로 p가 궁금했다. p와 나는 한두 번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그 이후로는 별다른 접점 없이 지냈다. p는 그녀의 무리와 다녔고, 나는 여전히 h와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단짝이었다. p와 h는.. 가끔 h가 우리 패거리에서 떨어져 혼자 있는 p에게로 가는 것을 본 적이 있지만 그런 일은 손에 꼽는다.


여기서 잠깐 h의 외모를 짚어보자면, h는 나와 키는 비슷했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다. h는 누가 보면 남잔가 오해할 정도로 개구쟁이 소년 같은 데가 있었다.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하자. 그녀는 잘생겼고 조각처럼 예뻐서 긴 머리를 갖다 붙여놓든 머리를 깎아놓든 어디 가나 이목을 끌 상이다. 반면 나는 동그란 얼굴에, 가느다란 작은 눈에, 아무 특징 없는 코와 입을 가졌다. 머리까지 짧아서 사람들은 나와 두 살 터울의 오빠를 혼동하곤 했다. 내세울 게 있다면 흰 피부와 장밋빛 볼.. 그리고 표정을 숨길 수 있는 능력. 나는 보통 웃는 얼굴 하나만을 가졌다. 그래서 아이들은 나에게 편하게 다가왔다. 내가 무뎌 보여서. 그런데 정말 무딜까. 그건 여러분의 판단에 맡긴다.


어느 날 나는 p의 생일이 다가와서 선물을 준비한다. p가 음악을 좋아한다고, 그리고 피아노를 좋아한다고 들었기에 나는 평소에 오빠가 자주 듣던 데이빗 란츠 - 언젠가 오빠의 방을 지나다가 그 신비로운 선율을 듣고 나는 즉각적으로 p를 떠올렸다 - 의 테이프를 선물하기로 한다. 분명 좋아할 것 같았다. 나는 비자금을 털어 레코드샵까지 몸소 가서 그것을 사 왔다. 이런 상황을 요약한 쪽지와 함께 예쁘게 포장한 그것을 p는 뜻밖이라는 듯이 받았다. 물론 그 쪽지에는 정말 간단히 ‘우리 오빠가 좋아하는 음악인데 네가 피아노를 좋아한다는 것 같아서 선물한다’고 쓰여 있었다. 음악을 좋아한다면 행간을 읽을 능력 정도는 되겠지 했지만 p는 마찬가지로 간단히 ‘고맙다, 들어보니 너무 좋았다’라는 짧은 쪽지로 인사를 대신했다. 거기에는 읽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 앞에서 나는 또 바보같이 웃었다. 실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러면서도 약간의 허탈함을 감추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나는 나날이 h의 음악적 취향이 바뀌어가는 것도 캐치해 낸다. 가요만 듣던 녀석이 부쩍 안 듣던 팝송을 듣는다. 아주 절절하고 센티멘털한 사랑 노래들이다. 나는 그런 h에게 때론 이죽거린다. 네가 언제부터 이런 곡 좋아했냐고. 나는 h와 중학교 때부터 친구다. 그녀의 그 시절 모습을 아는 아이들은 우리 반에 몇 없다. 그녀의 긴 머리 시절을 아는 것은 나뿐이다. 아이들은 그녀의 짧은 머리만을 기억한다. 그리고 내가 그녀의 긴 머리적 사진을 보여주면 난리가 난다. 아니 이렇게 여성스럽다고? 역시 예쁜 애는 어떻게 해도 예쁘네 하면서. 그 사진이 돌고 돌아 p에게 갔을 때 p는 손에 쥔 사진을 아무 말 없이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렇다. 아무 반응 없이 그 사진을 옆의 아이에게 넘긴 것은 p가 처음이다. 나는 그때 뭔가를 느꼈다. 분명 뭔가 있어. 뭔가 있다.. p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책상에 엎드린다. 나는 저 이어폰에서 나오는 노래가 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학기 중 우리 학급은 어딘가 외딴곳으로 일박이일의 수련학습을 가게 되었다. 넓은 캠프 부지 안에 위치한 복층으로 된 숙소를 우리 반 전체가 쓰는 것이다. 거기서 잠도 잔다고 했다. 나는 h와 함께 일층에 짐을 펼쳤고 p는 위층으로 그녀의 무리들과 함께 올라갔다. 잠시 후 p는 내려와 일층 구석에서 카세트 플레이어를 발견하더니 거기에 자기가 가지고 온 테이프를 넣고 틀었다. 시끄러운 팝송이었는데 아이들이 듣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p는 자기가 편해지기 위해서 그걸 튼 것 같았다. 주위 아이들 중엔 저 이상한 음악이 도대체 무슨 음악이냐며 수군거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p가 좋아하는 음악인가 봐, 내가 말했다.


밤이 되었다. 아이들은 일층은 일층대로 이층은 이층대로 수다를 떠느라 시끌벅적했다. 밤에 약한 나와 h는 안 그래도 하루종일 피곤했기에 일찍 자는 무리들 옆에 침낭을 펴고 누웠다. 눕긴 했으나 잠이 오지 않아 눈을 뜨고 두리번거리던 중에 문득 아이들이 늑대들마냥 하나둘씩 옆으로 오는 걸 느꼈다. 아이들은 조용히 감탄하고 있었다. 달빛에? 아니다. 숙소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의 교교함에 비춰진 h의 수려한 용모 때문이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잘생긴 애들은 잘 때도 잘생겼다. 아니 더 잘생겼다. 아이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h의 곁으로 다가와 앉거나 서있으면서 한 마디씩 했다. 야~~ 조각이다 조각. 저 코 좀 봐. 저 다문 입술 좀 봐. 와~ 잘 때도 이쁘네. 어떡하믄 좋아 등등. 그때 p도 어느새 뒤에 와있었다는 걸 기억한다. p는 아이들이 말하는 걸 들으면서 h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내가 보기에는 뭔가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왜? 예쁘니? 예쁘면 예쁘다고 하면 되지 왜 말을 못 해. 나는 그런 p가 안타까웠다. 나는 내손으로 p의 손을 가져가 h의 얼굴을 만지게 해주고 싶었다. 그때 p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별 거 아닌데 왜들 호들갑이야. 이유를 모르겠네... ’ 놀란 아이들이 p를 돌아보자 p는 천천히 위층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무리들이 그녀를 뒤따랐다. 나는 h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똑바로 누워 눈과 입을 굳게 닫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나는 h를 안지 오래돼서 안다. h는 지금 속으로 미소를 짓고 있다.








데이빗 란츠 - Cristofori's Dream

https://youtu.be/hm8y6kzXwEU?si=XizXiZBR-7P3FMPc


매거진의 이전글 소란의 진원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