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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leis Jun 05. 2024

그의 기억

쇼팽 소나타 2번

아이, 씨 - 미친. 이런 말이 입에서 툭 튀어나오게 한건 쇼팽이다. 포고렐리치가 친 쇼팽 소나타 2번이다. 어쩌면 포고렐리치의 탓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쇼팽은 - 처음 시작부터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더니 아닌 척 점잖을 빼다가 다시 저런 식이지, 그래 넌 항상 그런 식이지!!


너무 나갔다. 요즘 바흐의 평균율만 쳐서 그렇다. 바흐를 지상 최고의 작곡가로 칭송해 마지않던 내 의식세계에 돌을 마구 투척해 대는 저 리듬과 선율, 나를 잊었어? 정말 나를 잊었냐고? 내가 너한테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됐어? 마치 옛 애인처럼. 왜 이래, 끈적끈적하게. 하지만 마음속에서 들끓어 오르는 이 감정은 무엇인가. 가끔은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기보다는 드러나는 감정에 두드려 맞고 싶을 때도 있는 법이다.


글을 쓰던 중이었다. 아침에 한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다시 찬찬히 읽어보고 자료를 모으던 중이었다. 그런데 배경음악으로 틀어놓은 유튜브 플리에서 귀를 확 사로잡는 저 음악이 나오고. 나는 글을 포기하고 듣는다. 나는 얻어맞고 두 팔을 감싸 모으고 항복을 선언한다. 그리고 녹아버린다. 한여름 볕에 내놓은 아이스크림처럼. 몸에서 저항할 기운이 다 기화되는 느낌이다. 이렇게 된 거 모든 걸 멈추고 처음부터 다시 들어봐야지.


아니 저 음악이 나를 붙들고 흔든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러는가 하면 어느새 나는 엄마가 조용히 흔드는 요람 속 아기가 되어있다. 흔드는 손길이 바뀌었다. 당신은 누구요. 종잡을 수가 없는 흐름. 성인기 이전 그리고 그 초입까지도 쇼팽은 나의 최애였고 원픽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내가 배신을 때리기 시작했더라.


세상에 시니컬해지기 시작할 때부터 쇼팽은 나의 든든한 지원군이었고 출구였다. 그런데 이제 세상에 초연해지니 그가 필요 없어지지 않았나. 뭔가를 흔드는 그 선율이 부담스러웠다. 나는 배신자처럼 바흐와 모차르트에 손을 댔다. 한때 지겹고 딱딱한 음악이라 생각했던 바흐는 골드베르크의 아리아로 내 얼음 같은 편견을 살짝 깨 주었고 동요 같던 모차르트는 흐트러진 세상을 정돈하는 그리하여 순조롭게 흐르게 하는 아스피린이었다. 모차르트는 천재였고 바흐는 거의 신이었다. 쇼팽의 에튀드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연주할 줄 알면 정신과 안 가도 살 수 있을지 모른다는 치기 어린 생각을 했던 나는 이제 바흐의 평균율로 의원을 바꾸었다. 나는 인간의 세상으로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어렵게 얻은 위안과 성스러움, 평화, 초월을 잃고 싶지 않았다. 이 모든 건 비겁한 변명이다. 단순히 나는 쇼팽을 더 이상 같은 마음으로 칠 수가 없었다. 그 시절의 말랑말랑한 감성을, 어둠과 절망과 로맨스와 낭만, 취한 세상을 어떻게 다시 불러올 수 있냔 말이다. 차라리 고이 묻어 간직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알았어 알았어 인정할게. 그 시절이 좋았다는 것. 그 들뜸과 흥분과 자연스러운 합일 그 모든 게 좋았다고 인정할게. 다시는 그런 느낌 받을 수가 없다고 인정한다. 그러자 음악이 조용해진다. 듣고 있다가 이번에는 입에서 신음이 나온다. 나이 들고서는 가끔씩 너무 좋고 감탄스러운 것에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나온다. 상자 속에 시간이 가두어지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아름다운 것은 더욱 아름다워지고 나는 그걸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어떻게든 압력을 새어나가게 해야 하는 것이다.


한번 지나간 감성으론 다시 돌아갈 수 없지만 나는 요즘 40대에 쓸 수 있는 글을 고민한다. 왜냐면 나의 40대가 끝 무렵을 향해 치닫고 있는데 어쭙잖은 생각으로는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이 꼭 있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말하기 힘들어지는 것? 그게 있을 것만 같단 말이다. 또 모른다. 60대 70대가 되어도 지금이랑 똑같은 기분으로 할 말이 있다고 그게 40대와 전혀 다르지 않고 더욱 절실해지기만 했다고 느낄 수도 있다. 쇼팽의 곡이 끝나자 빌 에반스 아저씨가 내 차례란 듯이 또 감성을 헤집는다. 저 플리 위험해..



Chopin Sonata No. 2 - Pogorelich

https://youtu.be/V0GVaJq_CTM?si=yhEEiKmAEvK5MhF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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