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는 아이 엄마의 속사정
지난 5월 중순, 아이가 친구를 물었다는 어린이집 전화를 받았다.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의 무는 행동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어느 날은 팔, 어느 날은 손가락, 어느 날은 등…. 공교롭게도 아이가 무는 친구들의 엄마는 나와 아는 사이였다. 처음에는 아는 사이라 그런지 “이런 시기가 있다더라. 애들끼리 다 그런 거지 뭐” 좋게 좋게 넘어간 엄마들도, 어린아이가 물면 얼마나 심하게 물겠어라며 웃어넘기던 엄마도 아이 팔에 난 자국을 보고는 어쩔 줄 몰라했다. 그래, 좋게 말로 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내가 당사자라도 속상할 것 같았다. 백 번이고 이해가 되고 너무너무 미안했다.
아이가 친구를 물기 시작한 이후로 어린이집 알림장의 알림도 조금씩 늦어졌다. 1시 30분에 오던 알림장은 2시, 2시 5분, 2시 30분으로 기약도 없이 점점 늦어졌다. 어린이집 선생님도 아이에 관해 언급해야 할 말을 고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2시가 넘어 알림장 알림이 오면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일주일에 사흘은 아이가 친구를 물었다고 적혀 있었다. 나머지 이틀도 안심할 수 없었다. 알림장을 쓰고 난 뒤에 물었거나, 물려고 했지만 선생님이 보고 미리 제지한 경우가 태반이었다.
죄스럽고 미안하고. 내 속은 썩어갔다. 하원 후 일과는 반복이었다. 친구 엄마에게는 떨리는 손으로 사과 전화를 걸고, 선물을 전하고, 선생님께는 힘드시겠지만 내 아이를 잘 지켜 봐주십사 제지해주십사 부탁드리고, 집으로 돌아와 아이를 호되게 야단치는 것.
내 아이가 왜 다른 이를 아프게 하는 사람이 된 건지 속상한 마음에 “너 왜 또 그랬어!!!" 하고 아이를 다그치면 아이는 어안이 벙벙해했다. 엄마는 내 마음도 모른다는 듯이 바닥에 엎드려 펑펑 우는 아이를 보며 또 한 번 마음이 썩었다.
어린이집 선생님이나 주변 엄마들은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을 더 늘려라” “몸으로 놀면서 욕구를 해소해줘라” “한동안 가정보육을 하는 게 어떻겠냐”라고 한 마디씩 거들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미어졌다. 돌려돌려 말하지만 다들 아이가 이러는 이유를 '엄마의 애정이 부족해서'로 단정 짓고 있었다.
물론 집에서 내내 가정보육하는 아이와는 비할 바 아니지만 아이와 내가 보내는 시간의 질은 결코 허술하지 않다. 우리는 매일 하원 후 놀이터에서 2시간씩 깔깔대며 논다. 날씨가 좋지 않으면 동네 도서관에서 함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서로 눈을 바라보며 살 부대끼기를 좋아하는 우리를, 매일 하루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며 잠드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를, 어떤 누군가는 의심스럽게 보기도 한다는 걸 그제서야 알았다.
아이와 한참 깔깔대고 나면 엄마인 나는 충만한 사랑을 느꼈는데 아이는 그렇지 않았던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위험한 것만 아니면 아이가 원하는 대로 실컷 하게 해주었는데, 그게 잘못된 양육태도였을까? 정말 내가 아이를 잘못 키웠나? 다소 예민하고 까다롭긴 하지만 엄마 아빠에게는 애교도 많은 아이라 이런 전개와 주변의 조언이 당황스러웠다.
결국 답답한 심정을 안고 아동발달심리센터에 상담을 받으러 가기로 했다.
아이가 어떤 상태인지, 우리 부부의 양육태도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진단해보고 싶었다. 어쩌면 내가 좋은 엄마는 아니지만 최소한 나쁜 엄마는 아니라는 증거를 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가족이 총출동해 아동기질검사, 부모양육스트레스검사, 놀이태도 검사를 이어서 받고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결과는 부모 양육 스트레스 수준은 보통, 양육태도는 매우 좋다는 소견. 다만 아이가 기질적으로 민감해 주변 환경에 빠르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편이라고 했다. 집에선 아무래도 아이 기질에 맞추어 돌보다 보니 우리 부부의 리액션도 반응도 적극적이고 빠르게 이루어 지고 있었다. 그에 비해 단체생활을 하는 어린이집에선 그렇지 못하다 보니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으로 추측됐다. 평소 본인 기준치에 비해 관계 만족감이 다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린이집 반 친구 10명, 선생님 2명. 혼자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가 반도 아닌 20%만 받고 있으니, 관심을 더 받고 싶고 친구가 미워지는 거였다. 친구가 본인의 영역을 침범할 때, 장난감을 뺏길 때, 선생님이 다른 아이를 안아줄 때 불안감이나 민감성이 발현되며 본인이 가장 실행하기 쉬운 방법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그 방법은 친구를 밀고 무는 것 등 마치 갑자기 동생이 생긴 아이의 반응처럼 나타났다.
결국 무는 행동을 보인 것은 스트레스의 표현이자,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이자, 관심받고 싶은 수단이었다. 아이 입장에서는 상대를 무는 것이 최선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센터에서는 아직 언어표현력이 미숙해 행동으로 자신의 요구를 표현할 수 있다며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친구를 아프게 하는 위험한 행동이니 내버려 두지 않고 다신 못하도록 심하다 싶을 정도로 단호히 제지해야 했다. 아주 무섭고 단호하게. (+이후로도 역할놀이, 관련 그림책으로 지속적으로 지도하고 있다.) 단, 아이의 불안하고 속상한 감정은 꼭 품어줘야 한다.
가정보육을 계속했다면 아이의 공격적 행동은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며, 상담을 받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나 살자고 나 좀 제대로 살자고 한 행동의 결과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아이를 여기까지 데리고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이에게 너무 미안했다. 하, 사실 이러나저러나 아이에게 미안할 것이긴 했다. 그래도 검사 결과를 통해 우리가 아주 이상한 건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아이를 더 품어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도 약간 생겼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아이의 기질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으니 묘했다. 혼자 비밀스럽게 간직하고 있던 어릴 적 나를 들켜버린 것 같은 기분었다. 사실 지금 아이의 모습이 어릴 적 내 모습인 것이다. 학교와 직장을 통해 사회화를 거듭하며 잠시 있었던 나의 기질을 아이를 통해 다시 본다. 초등학교 일기장엔 허구한 날 ‘내가 더 잘한 것 같은데 왜 쟤가 상을 받았지?’ 식의 웃기지도 않는 시샘 타령이었다. 게다가 ‘우리 엄마는 왜 나에게 잘해주지 않지? 우리 엄마는 계모인가?’ 같은 생각도 종종 하며 엄마의 사랑에 목말라했었다.
아이를 낳고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며 예민하고 질투 많은 어릴 적 나도 품어본다. 엄마의 예민하고 불안한 피를 타고난 아이는, 커가면서도 계속해서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리게 할 것이다. 아이를 품고 나의 어린 시절도 동시에 품는 연습을 해나가며 고슴도치가 어떻게 자식을 포옹할 수 있는지 새삼 깨우쳐 간다.
등 위에 곤두선 바늘이 콕콕 찌를 것 같은 고슴도치 새끼를 그 어미가 품은 장면을 섬세하게 묘사한 그림.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한다.’ 털이 보드랍고 윤기가 있다고 한다는 말이다.
저 고슴도치처럼 서로에 대한 의심 없이 나를 닮은 아이를 꼭 안아주며 자리를 지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