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이 많은 아이를 키우며
나도 질문이 많은 아이였다.
한때는 ‘호기심 천국’이 별명이었을 만큼 궁금한 게 많았다. 질문이 많아도 너무 많았을까. 갱상도 상남자 아버지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어른에게 대드는 건방진 태도로 받아들이셨다. 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왜요는 일본 담요가 왜요다 임마!”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되로 주고 말로 받고 있다. 질문-답변 굴레에 갇힌 상태다.
“엄마, 모기가 왜 내 다리에 자꾸 뽀뽀해?” “엄마, 왜 옥수수에 수염이 나있어?”
“엄마 딸기는 왜 추울 때 나와?” “엄마 왜 달 반쪽이 없어졌어?”
음… 그건 말이야.
아이가 그렇게 질문을 해댄다. 세 돌 전후로 아이의 질문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뭘 그렇게 자꾸 묻는지, 질리지도 않는지 모르겠다.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에 정신이 혼미해져 일본담요가 목구멍 끝까지 솟구친 적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 일본담요를 언급한 적이 없는 이유는 내가 어릴 적 겪은 환경을 아이에게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에게 정성껏 대답해줬더라면, 하다못해 들어주는 척이라도 했더라면. 신이 나서 더 질문을 더 했을 텐데. 더 많은 것에 호기심을 가졌을 텐데. 더 세상을 신나게 탐하며 누렸을 텐데.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운 마음으로 내 아이에게는 부족하더라도 정성껏 대답해주고 싶다.
사실… 마음은 굴뚝같은데 현실에서 적용하기란 굉장히 어렵다.
엄마, 바나나가 왜 이렇게 까매?
바나나 끝이 검게 변해 있었다. 어떻게 설명해줘야 잘 설명해줬다고 소문이 날까. 과학적 상식을 기대하며 남편 허벅지를 콕콕 찔렀다. 그는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났다. 서로 답변을 미루다 결국은 내가 입을 열었다.
“아, 바나나가 나이가 들어서 그래. 아기 바나나는 하얗고, 더 크면 노래지고, 나이 들수록 까매져. 까만 부분 맛있다? 엄청 달콤해져. 사람도 나이 들수록 달콤하고 똑똑해지잖아.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아이는 한참을 듣더니 자기가 마시던 우유를 보며 한술 더 떴다.
“그럼 우유도 그래? 까매져? 달콤해져?”
상한 우유를 먹을까 노파심이 들어 선을 그었다.
“아~니~! 우유는 오래되고 나이 들면 상해. 그래서 먹으면 안 돼.”
이해하는 듯했지만 아쉬운 표정이 가득하던 아이의 얼굴. 그러고 돌아서 설거지를 하는데 아차 싶었다. 우유도 환경에 따라 치즈나 요거트가 될 수 있잖아? 아쉬웠다.
기회가 된다면, 우유를 두고 함께 관찰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요즘은 나도 다시 궁금한 것이 많아진다. 아이의 질문으로 꺼져가는 엄마의 호기심 불씨가 되살아난 기분.
“엄마! 파란색은 왜 초록색이랑 친해?
“엥?? 그렇게 보였어? 그럼 빨간색은 누구랑 친한데?”
“빨간색은 주황색, 노란색이랑 친해.”
“분홍색은?”
“분홍색은… 보라색이랑 친한 것 같아.”
“왜?”
“둘이 수상해 보여.”
“네 눈에는 수상해 보이는 게 비슷해 보이는 건가 보다. 비슷해 보이는 게 친한 거라고 생각하는 거구나!”
물어볼수록 웃음이 터지니 계속 묻고 싶었다. 묻다 보면 답을 아이에게서 구하기도 했다.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니 척척박사 엄마가 되기는 이미 틀렸다.
그래도 척척찾사는 되어주고 싶다. 척척 좋은 답변을 내놓기보다는 같이 답을 ‘찾’아나갈 수 있는 척척찾사. 우리가 앞으로 함께할 세상이 얼마나 재미있을까. 아이의 반짝거리는 눈을 바라보며 내일을 상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