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북마을 촌장 Sep 01. 2021

내가 주인이 못 되는 이유

일인칭 vs 삼인칭 삶

김민기 씨가 <아침이슬>을 완성할 수 있었던 계기에 대해서 고백하는 것을 들었다. 아침이슬을 작곡하다 막히면 다시 그림을 그리고 그림이 막히면 아침이슬로 돌아가 곡을 완성하려 해도 완성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자신 집 주위 무덤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계시를 받듯 <그>를 <나>로 바꾸게 되었고 그 순간 아침이슬을 완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침이슬의 <나>는 완성되기 전에는 <그>였던 것이다.


<내> 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 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우리 모두의 삶에 대한 스토리는 대부분 3인칭 문법인 <그>로 채워져 있다. 심지어 내가 실제로 수행하는 대부분 역할들도 따지고 보면 다 삼인칭 문법이다. 부모님이 그랬어, 회사에서 본부장이 그러라고 했어, 목사님이 그랬어, 선생님이 말했어, 친구가 그랬어, 어떤 위인전에도 나와 있어, 과학잡지에 나와있어, 유명한 자기 계발서에 나와 있어 등등 내가 수행하는 역할 중 삼인칭 아닌 것을 찾기가 힘들 정도이다. 나는 삼인칭인 그가 써놓은 내 역할에 대한 대본을 연기하는 연기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연기자로서 남의 인생을 대신 살고 있는 것이다.


노장사상을 불교에 접목시켜 새로운 철학적 경지를 완성했던 임제선사는 "어디에 가든 일인칭 주인공의 삶을 살면 사는 것 모두가 진리로 실현될 것이다"라고 조언했다. 


삶의 문법이 <삼인칭>인 그의 문법에서 우리가 전제된 <일인칭> 문법으로 전환되지 않는다면 진정성 있는 주체적 삶은 가능하지 않다. 아무리 새로운 것을 배워도 이 새로운 것이 일인칭으로 전환된 내러티브가 되어야 자신의 세상을 보는 지도인 정신모형을 업데이트하는 일에 사용된다. 삼인칭의 삶으로는 자신의 지도를 업데이트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영향을 미치지 못한 지식으로 머물다 사용이 빈도수가 떨어져 결국은 자연스럽게 잊힌다. 일인칭 내러티브는 자신의 삶의 지도를 업데이트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삼인칭 문법은 객관화된 명사적 삶을 강요하는 것이고 일인칭 문법은 동사화된 주관적 삶에 대한 가이드라인이다. 진정성 있는 동사화된 삶은 일인칭으로서의 <내가> 나의 삶에 대한 대본을 스스로 마련하고 이 이야기를 삼인칭에게 들려줌으로 피드백과 지원을 받아서 실제로 <내> 삶을 완성할 때 달성된다. 자아를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로 자아를 구분할 때 내적 자아는 스토리 작가이고 외적 자아는 이 스토리의 대본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스토리텔러이자 자신 삶의 큐레이터이다. 우리의 주체적 삶은 이 두 자아가 제대로 협업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스토리 작가인 내면적 자아가 나에 대한 대본을 제대로 완성하고 외면적 자아인 스토리 텔러는 내재적 자아가 쓴 나의 스토리를 전파함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지원을 이끌어낸다. 또한 스토리 텔러는 그들로부터 들은 내 스토리의 미진한 점에 대한 피드백을 내재적 자아에게 전달해주는 에이전시인 것이다.


조직에서 한 때 권한위양이니 임파워먼트 등의 프로그램이 유행한 적이 있었지만 제대로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임파워먼트의 본질에 대해 잘못 알고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파워먼트는 역할 스토리를 쓸 수 있는 권한을 구성원에게 넘겨주고 실제로 구성원이 역할 스토리를 쓰고 이 스토리를 수행해서 완성시킬 수 있을 때에 달성되는 것이지 단순히 권한을 넘겨주는 것으로 달성되지 않는다. 권한을 넘겨주었어도 자신의 역할 스토리를 권한 범위에서 써가지 못하면 임파워먼트의 의도는 무산된다. 물론 <나>의 역할 스토리는 조직이 설정한 목적이나 존재이유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쓰인다. 이 범위는 우리라는 맥락을 제공해주지만 결국 이 우리도 일인칭 문법이다.


요즈음 기업들에서 고심하고 있는 인게이지먼트는 더 무리한 요구이다. 인게이지먼트는 자신의 영혼을 자신이 하는 일과 섞어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인데 영혼 없이 3인칭 역할만을 충실하게 수행하도록 강요하는 회사가 종업원에게 임파워먼트를 넘어 인게이지먼트까지 넘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회사가 종업원을 삼인칭 삶을 강요하는 것을 넘어서서 영혼 없는 좀비로 전락시켜놓고 이제는 영혼을 가져오라고 주장하는 장면은 물에서 건져 주었더니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강요하는 형국이다.


누구든 어떤 일을 통해 <그의> 스토리를 구현하는 삶과 <나의> 스토리를 구현하는 삶을 선택하라면 당연히 나의 스토리를 구현하는 주인공의 삶을 선택할 것이다. 일인칭이 제공하는 에너지와 삼인칭이 제공하는 에너지는 천지차이다. 하지만 대부분 회사에서 직원들의 일과 역할에 대한 문법은 다 삼인칭이다. 이들은 3인칭 관객으로 머물지 말고 일인칭 선수로 뛰라고 말은 하지만 모든 관행이나 문화는 삼인칭 삶을 강조한다. 이중몰입의 극치를 보이는 곳이 기업이다. 초일류기업이라고 일컬어진 기업들만 이런 이중몰입의 의식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일인칭 문법을 허용하고 강화하고 보상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일반기업에서 사람들은 삼인칭 <그>의 역할을 대신해 수행해주는 대신 월급을 받는다. 월급에는 암묵적이기는 하지만 일인칭 문법을 사용해 주인으로 나서지 않는 조건이다. 초일류기업들에서 시도되고 있는 사명지향 역할조직 설계라는 것은 우리라는 맥락 하에 일인칭 문법을 사용하도록 허락하고 여기에 공정한 월급도 덤으로 주는 것을 의미한다. 월급이 차라리 덤인 것이다.


옛날 기업비리의 백화점으로 불렸던 한보그룹 전임 회장 정태수 씨가 법정에서 자신 회사의 임원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생각난다. <걔들 머슴들이 뭘 알아?>.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대한민국의 대부분 기업들은 삼인칭 문법을 통해 종업원에게 머슴역할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머슴들에게 임파워먼트 인게이지먼트 등을 이야기해가며 주인의식을 가지라고 강요하는 꼴이다. 한 마디로 이런 무책임한 기업의 관행은 기업의 종업원에 대한 갑질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자신을 이런 일인칭 삶의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일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알고 있는 답은 자신을 진심으로 온전하게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온전한 사랑은 로맨스 영화에서 통상적으로 보여주는 줄거리에도 담겨 있다. 연인이 온전하게 사랑하면 서로를 자신의 삶의 주인공으로 내세우기 시작한다. 온전한 사랑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면 서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자신의 하인이나 도구로 전락시킨다. 부풀려진 자신 EGO의 감옥에 상대를 노예로 가둔다.


일인칭 삶이 안 되는 더 결정적 이유는 사랑에 대한 편식 때문이다. 사랑의 편식이란 자신을 사랑해도 자신이 가진 장점, 외모, 좋은 점만 선택해 이것들을 부풀려가며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아픔조차도 자신으로 받아들이고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자신을 일인칭 주인공으로 세운다. 아픔조차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만 자신을 삶의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구성원의 성장에 대한 아픔을 소중하게 여기는 기업들에서만 구성원은 이 회사의 주인으로 나선다.  


예수가 기독교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었던 이유도 유대인과 구약의 삼인칭 율법주의를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앉은뱅이, 나병환자, 고아, 과부의 아픔을 치유하는 기적을 행하며 이들에게 가르친다. "나(예수)를 믿는 삼인칭 믿음이 아니라 너 자신에 대한 일인칭 믿음이 너를 일으켜 세웠다." 


#임파워먼트


#목적경영

작가의 이전글 세 가지 수준의 지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