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에서 보내는 편지
여행을 가는 일은
여행 가방을 챙기는 일에서 시작된다.
나는 여행가방을 챙기는 일에 능숙하지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 여행지가 아무리 멀더라도, 여행기간이 아무리 길더라도, 나는 궂이 앞당겨 짐을 챙기지 않는다.
대부분 나의 짐은 당일에 쓱쓱 널려있는 옷가지를 쓸어담아 챙겨진다.
우산을 챙기기 귀찮으면, '비는 오지 않을꺼야.' 하고 믿어버리는 식으로 나의 여행가방은 언제나 단촐하게 챙겨진다.
엄마는 여행을 가면 언제나 샤워 후에 속옷을 빨아 다음 날 입으셨다.
나는 게을러서 속옷을 빨아놓고 자지 않을 때가 더 많지만, 여행가방을 챙길 때는 늘 엄마의 습관이 내 습관인 냥, 믿으며 속옷도 두개 이상을 챙기지 않는다. 내 여행가방은 아주 단촐하지만, 아주 두서도 없다.
서진이는 학기가 끝나면서 수학여행을 갔다. 3박4일의 짧은 일정이었다.
서진이는 늘 그렇듯이 일주일 전 부터 여행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밀린 빨래가 다 되기를 기다리다 못해, 스스로 챙기고자 하는 옷가지들의 빨래를 시작하고, 주르륵 옷들을 꺼내놓고, 입어보고 매치하고, 골랐다 빼냈다, 액세서리도 이걸 넣었다 저걸 넣었다, 화장품을 조르륵 작은 용기들에 옮겨담았다 필요한 것을 사러 뛰어나갔다, 이렇게 일주일을 보내고 차곡차곡 캐리어에 아주 정갈하고 질서정연하게 챙겨 담고 내 앞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했다. 이건 가는 날 입을 옷, 이건 도착해서 갈아입고, 수영 후에 입을 옷, 캠프파이어 할때 추울 지 모르니까 입을 긴팔....
나는 응, 응, 잘했네. 하며 장단을 맞춰 주면서, '미쳤구나, 하루에 왜 옷을 세번 갈아입냐? 여름밤에 캠프파이어 하면 날은 덥고 앞에서는 불이 활활 타오를텐데 긴팔이 왜 필요하냐?' 하는 반문을 입에 담지는 않고 머릿속에만 데굴데굴 굴리며 들어주었다.
코로나가 한창이라 여행이 먼세상 나라의 일이 되었을 때, 서진이는 ''엄마! 나 캐리어 끌고 어디 가고 싶어!" 했다. 그러면서 한 손을 뒤로 빼서 캐리어를 끄는 흉내를 내면서 ''이렇게 막 끌고 공항 갔다가 여기저기 가고 싶어!" 했다.
나는 그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우리가 당연하게 했던 일들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마음속에 일렁이는 그 당연한 것들에 대한 향수, 그리움, 영원이 못할 것 같은 두려움.
가까운 유럽에서 이웃나라 여행을 갈때, 나는 언제나 백팩 하나이다. 하지만, 서진이가 했던 이 말이 늘 마음 속에 남아서 지난 번 여행을 갈 때는 일부러 큰 맘 먹고 짐 추가를 해서 표를 끊었다. 그리고 말했다.
" 너 좋으라고 캐리어 추가했어. 맘껏 끌고 다니라고."
우리는 갈 때는 거의 빈 가방으로 들고 간 그 캐리어에 물건을 채워 와야한다는 묘한 사명감에 젖었다. 목적지가 밀라노이니, 왠지 쇼핑을 해줘야할 것만도 같았지만, 끄는 재미에 추가한 캐리어일지라도, 이왕 짐추가 비용까지 내가며 갖고간 캐리어를 비워갖고 오면 도리가 아닌 것도 같았고, 의무를 다하지 못한것도 같았다.
그래서 쓸데 없이 우리는 물건들을 사기 시작했다. 벼룩시장도 가고, 구둣가게도 가고, 면세점도 가고, 여행은 사는 재미더냐?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넘쳐났고, 모든 이들의 쇼핑백은 찢어져라 가득했고, 내 딸도 신이났다.
"엄마! 이 구두 사드릴까? 이 옷 엄마한테 어울리것 같은데? " 하고 말하면 엄마는 말씀하셨다.
''이제 있던 것도 다 버리고 싶어"
우리는 일생을 무언가 사기 위해 살았는지 모른다. 어릴 때는 종이인형을 샀지만, 좀 더 커서는 옷도 사고 화장품도 사고, 워커맨도 사고 그렇게 단위가 커지면서 차도 사고 집도산다. 그것들을 사기위해 벌고, 그것들을 쟁여놓을 곳을 사고, 그것 들을 들고 이고 다닐 것들을 산다. 늘 여행을 하면서 여행이 미니 인생체험이라 생각했던 나는 여행가방을 작게 갖고 다니지만, 내 인생에는 얼마나 많은 짐들을 지고 다니나 문득 묻게되었다.
내가 처음 신혼집을 꾸미고 살 때, 우리 집에 세탁물을 배달해주러 오신 아저씨는 현관에서 집 안을 슬쩍 들여다 보시더니 "어~ 아직 이사는 안오셨구나!" 하셨다. "엥? 이사 온지 6개월 지났는데요?" 하니까 " 근디, 집이 왜이렇게 횡혀?" 하셨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나서는 짐이 점점 불었다. 전집으로 사주기 시작한 책들이 불어나 책장을 꽉꽉 채웠고, 집안 구석구석엔 언제 필요할 지 모르는 물건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물건을 많이 사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바지런하고 용의주도하게 물건들을 정리하는 성격도 되지 못해서 물건들은 언제나 내 눈 앞에서 뒹굴었다.
몰타로 이사를 갈 때, 나는 두 세번, 이 물건이 정말 필요한가? 묻고 물어야했다. 밥공기 세개, 수건 세개, 주걱 하나, 신발 여름용 하나, 겨울 용 하나...그렇게 챙긴 짐덩이는 그래도 23kg씩 세덩이였다. 처음 살던 몰타 아파트에서 비르키르카라의 집으로 옮길 때, 나는 이사를 도와주는 친구에게 말했다. ''우리 짐 없어. 23kg짜리 캐리어가 3개야." 왠걸. 짐은 계속 계속 나왔다. 23kg3개로 왔는데, 아무것도 사지 않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보따리는 다시 대 여섯개로 불어나 있었다.
오늘도 서진이는 새 반바지를 사야하고 화장품 좋은게 나왔다고 하고, 반지도 목걸이도 사고 싶다고 한다.
나는 엄마 말대로 있던 것도 다 버리고 싶다고 말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보면 눈이 돌아가서 사재기를 한다. (주로 그릇들)
여행을 하며 여행가방을 챙기듯, 살아가며 이삿짐을 챙긴다.
여행을 하며 하루에 세번 갈아입을 옷이 필요하지 않다고 단촐하게 짐을 챙기지만, 살아가면서 불어나는 짐들은 결코 단촐하게 추려내기가 쉽지는 않다.
왜 짐들을 이고 지고 다녀야 할까,
살면서 필요한 것들은 정작 그리 많지는 않은데...
없어도 되는 것들을 사고 싶어 돈을 벌고, 돈을 벌기 위해 힘들고 바빠진다.
물욕을 내려 놓으면 거기에 채워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여행가방을 가볍게 하고 다니면, 삶의 물건들이 단촐해지면,
거기엔 분명 채워지는 것들이 생길 것이다. 영적인 것들?
영적인 것들을 영접하기엔 아직 멀었지만, 가진 것을 줄여보며 살고 싶지만,
맨날 집도 사고 싶고, 전기차도 사고 싶어진다.
나의 생각은 진보적이고, 깨어있는 듯 하다가도 결정적일 때 앞뒤가 맞지 않다.
서진이는 친구를 만나러 몰타에 갔다.
비행기표를 본인이 모은 돈으로 산다기에, 표 값은 내줄 테니, 짐은 없이 가보자고 했다.
캐리어 말고 백팩 하나.
그녀는 고민했다. 일주일 동안 이걸 넣고 저걸 빼고 했다.
가기 전에 그래도 서진이는 방글방글 웃었다.
"엄마! 나 그래도 가방에 여유도 있어. 올때 뭐 좀 살수 있겠어."
그래. 아가. 뭔가 가볍게 하고 다니면, 그렇게 살면, 우리가 좀더 영적으로 풍성해지지 않을까 하는 엄마의 기대는 오늘도 여전하다. 근데, 오늘 네가 갖고 싶다는 다이슨 고데기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