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보내는 편지
지난달엔 꼬마의 두 번째 생일이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조촐한 생일 파티를 했다. 생일 파티는 파티인데 어린이날과 생일과 어버이날을 절묘하게 겹친 그래서 몹시 가족스러운 행사가 되고 말았다. 거기엔 장난감 코너에 가서 새 장난감 고르기(모래놀이 세트와 비눗방울 장난감), 왕할머니 댁 방문(멀리서 온 증손자에게 용돈을 주셨는데 아직 돈이 뭔지 모르는 꼬마는 잠시 손에 쥐고 있다가 바닥에 버리고 달아났다), 다 함께 모여 앉아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촛불 불기(꼬마는 아기 상어 케익을 몹시 마음에 들어했다), 진한 미역국과 제철 음식으로 가득한 밥 먹기 등이 있었다. 뜨끈한 미역국을 한 술 뜨자 밤낮 가리지 않고 삼시세끼 미역국만 들이마시던 때가 떠올랐다. 2년 전 꼬마를 낳았을 때였다.
소고기 미역국, 황태 미역국, 조개 미역국, 들깨 미역국. 그 밖의 수많은 미역국들. 미역국의 바리에이션이 이토록 다양함을 알게 되었다. 미역은 피를 맑게 하고 국물은 젖을 잘 돌게 하고 등등. 산모에게 집중적으로 가해지는 '무엇 무엇하면 무엇 무엇에 좋다. 그러므로 너는 반드시 무엇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들에 미역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준엄한 격언들에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으나 무력하고 미약한 나는 꾸역꾸역 국물을 들이켰다. 미역국을 싫어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따라서 젖은 잘만 돌았고, 이내 다시금 새로운 명이 떨어졌다. '원래 모유가 잘 나오는 체질인 것 같으니 이제 국물 먹지 마세요. 아직 아기가 그만큼 먹지를 못해서 자칫하다간 유선염 걸릴 수도 있어요.' 아, 네.
조리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첫날밤, 아기는 달라진 환경을 알아차렸는지 으앙으앙 울어댔다. 젖을 물려보고, 안고 토닥여 보고, 백색 소음을 틀어보고, 기저귀를 확인해 보고, 다시금 저린 손목으로 안아들어봤지만 아기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자기를 안아든 이의 서툴고 어설픈 손놀림과 무엇보다 당혹스러워하는 마음에 관해. 나는 지쳐나가 떨어질 것만 같았다. 겨우 잠이 든 것 같다가도 온몸을 뒤틀며 낑낑거리는데 혼미한 정신 너머로 아기의 보채는 소리만 또렷하게 들려왔다. 가사 상태의 정신도 사정없이 낚아채는 울음소리,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그때마다 가슴에서 젖이 돈다는 거였다. 일발 장전의 기세로 핑, 핑핑. 울음소리에 반응하는 가슴이라니, 이제껏 전혀 몰랐던 일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젖은 수유를 할 때만 나오는 줄 알았고, 당연히 아이가 무는 쪽만 나오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아기와 완전히 동기화된 가슴에선 동시에 젖이 나왔다. 게다가 그 양상도 상상과 아주 달랐다. 나는 그게 아주 가느다란 빨대처럼 한 줄기의 모유가 주루룩 흐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여러 개의 작은 구멍에서 동시에 젖이 나왔다. 쏴아, 하고 쏟아지는 샤워기 물줄기처럼. 그걸 사출이 심하다고 하는데, 사실을 적시하는 그 말조차 내겐 지적처럼 들렸다. '젖양이 많아서 사출이 심하네요. 아기가 사레들려서 켁켁거리네요.' 그런 말을 들으면 왠지 잘못하는 것 같아 고개를 숙여야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게 무슨 잘못인가? 싶다가도 그 상황 속에선 내 잘못처럼 여겨졌다.
많은 부분이 그러했다. 불안에 기반해 머나먼 희망을 속삭이는 사람들. 나는 아기를 안아들고 시종일관 전전긍긍했다. 초여름임에도 겹겹이 싸맨 아기의 얼굴 위로 붉은 열이 번질 때 나는 당혹스러웠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울어댈 때마다 나의 신경은 곤두섰다. 무엇을 원하는 거니? 무엇을 해 주면 되는 거지? 물어도 대답할 수 없는 아기는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꼬았다. 그 무렵, 둥근 배의 가운데, 과자 봉지를 봉해둘 때 쓰이는 것과 똑 닮은 다만 크기는 작은 클립이 뚝 떨어졌다. 클립이 붙잡고 있었던 것은 탯줄의 끝 부분이었다. 그러자 동그랗고 오목한 배꼽이 나타났다. 나와 열 달 동안 한 몸이었다가 이제 온전한 한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가 바로 거기 있었다.
그리고 2년의 시간이 흘렀다. 우리의 동기화는 예전처럼 강렬하지 않다. 꼬마의 울음에 내 몸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도 않는다. 뇌의 어느 부분은 울음소리를 접수하지만 상황에 따라 다르게 대응하게 된다. 어떤 울음은 달려가 안아들고 아픈 곳이 어디냐며 묻게 되지만, 또 어떤 울음은 그저 모른 척하고 지나치거나 찌푸린 두 눈을 들여다보며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돼.'라고 단호하게 말하게 된다. 이제 꼬마도 그걸 안다. 뱃속에 품고 어느 곳에나 함께 다니던 때와 달리 이제 나보다 앞장 서서 달려가기도, 미적거리며 늦게 따라오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뭔가 무서운 것, 낯선 것이 보이면 후다닥 달려와 다리에 감기고 든다. 바짓자락 혹은 치맛자락, 때론 속옷까지 거머쥘 기세의 파고듦 앞에 나는 이 공포 앞에 굳건해질 필요를 느낀다. 괜찮아, 괜찮아.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는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어렵사리 발을 떼면서. 그러니 우리 사이엔 보이지 않는 강한 연결이 생긴 셈이다. '생일'이란 주제로 글을 쓰자고 생각하며 제일 먼저 꼬마의 생일, 그러니 우리가 함께 만들어 낸 그 순간. 벌건 피가 뚝뚝 듣고 새된 울음이 수술방을 메우고, 존재하지 않던 것이 존재하게 된 시점을 떠올리게 되었으니. 아무래도 이건 쉬이 끝나지 않는 사랑임에 분명하다.
'바르셀로나와 서울에서 보내는 편지'는 바르셀로나의 박민아 님과 함께 2022년부터 시작한 프로젝트입니다. 우리는 각자 다른 도시에서 8시간의 시차를 공유하며 한 달에 두 번 같은 주제로 에세이를 씁니다. 이 프로젝트가 어디까지 어떻게 흘러갈지 아직 알지 못하나 우리는 정말 즐거운 기대를 안고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꾸준히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써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