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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a Nov 23. 2022

#17 농땡이

바르셀로나에서 보내는 편지

오랜기간 글쓰기를 뒤로하고 지냈다.

글을 써야지 하고 마음 먹었지만, 은아씨가 툭 던져준 제목 ''농땡이''에 부합한 글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작게 작게 농땡이를 부린 적은 있는데, 크게 농땡이를 부린 적이 없기 때문일까?


농땡이의 뜻을 일단 찾아본다. 

'일을 하지 않으려고 꾀를 부리며 게으름을 피우는 짓, 또는 그런 사람'

기억을 더듬어 본다. 꾀를 부려가며 게으름을 피운 적이 언제였을까?


왠지 학교에 가기 싫은 날 부렸던 꾀가 있다. 아마도 이때 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날씨가 스산해지고, 엄마가 난방을 하기 시작했을 때 즈음... 따뜻한 아랫목에서 잠을 자고 나서 노골노골 녹혀진 몸을 이불을 박차고 일으키기 싫은 날이 있었다. 그 날은 싫은 선생님 수업이 있었거나, 해놓아야 할 숙제를 마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러가지 이유는 다급하게 조합이 되고 조작이 되어 학교에 가지 않고 이 따뜻한 방에서 더 머물며 농떙이를 부릴 계획이 야심차게 세워진다. 

나는 그때마다 방바닥에 이마를 지졌다. 엄마나 아빠가 새벽에 연탄 불을 한 번 바꿔 놓으셨기 떄문에 우리가 일어날 시간 즈음 방바닥은 정말 따끈따끈해서 배 밑에 손을 깔면 델 것 같은 적도 있었다. 

나는 엄마가 잠을 깨우러 오시기 전에 이마를 바닥에 찰싹 붙혀서 뜨끈뜨끈하게 지져댄다. 엄마가 오셔서 "민아야, 일어나! 학교가야지! " 하실 때면, 아주 힘 없는 목소리로, "엄마...나 감기 걸린 것 같아. 열나는 것 같아..." 하고 오만상을 찌푸리고 아픈 척을 해본다. 엄마는 이마를 만져보시고는 이내 목덜미, 겨드랑이 곧곧을 만져 보신다. 그러고는 늘 간결하고 명석한 판결을 내리신다.  

" 빨리 일어아! 꾀병이야!"

내 방법이 더 미련해서였는지, 엄마가 더 명석해서였는지, 이 사기극이 성공해서 농땡이에 성공한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 이후에도 분명 자잔한 농땡이 모략이 있었겠지만, 생각나는 것은 삼일에 다니던 어둡고 기나긴 밤들이다.

우리는 언제나 야근이었다. 밖이 훤할 때 퇴근하는 사람들은 전생에 나라를 구한 분들이시다. 라고 생각하던 때였다. 다른 별 나라의 일이었다. 딱히 야근하지 않아도 되는 날도 분위기가 그러했다. 으례 저녁 시간이 되면 삼삼오오 모여 저녁을 먹으러 갔다가 들어와서 자정이 넘도록 답도 없는 숫자를 들여다 보거나, 답을 만들 숫자를 조합해대곤 했다. 


12월말 회계장부가 마감이 되면 시작되는 감사는 1월2월이 피크였기에, 으례 춥디추운 겨울의 긴밤들을 사무실 형광등 아래에서 늦도록 보내고 다음날이 되서야 집에 돌아가곤 하던 날들이었다. 

하지만, 이 어둡고 칠흙같던 겨울 밤들이 지나고 꽃이 피고 새가 우는 봄이 와도 우리들을 반기고 기다리던 것들이 있었으니, 외국계 기업 3월말 법인들이었으며, 금융기관들의 분기감사가 그것들이었다. 

기나긴 겨울 밤들은 그러려니, 나는 죽었으니, 이번 생은 이렇게 살다 죽겠으니...하며  묵묵히 보내왔지만, 꽃이 피고 새가 울고 날이 밝은 6시 7시 즈음에 퇴근을 하는 전생에 나라를 구한 사람들을 보면 우울이 치달아 오르는 때가 많았다. 

하지만, 모두들 저녁을 먹으러 같이 나가서 같이 들어오는 일상인지라, 나 혼자 노트북을 접고 가방을 들고 퇴근을 한다는 것은 그 당시에는 퇴직의사를 멋지게 밝히는 바와 다르지 않았으며, 그렇게 용감하게 날이 밝을 때 노트북을 과감히 덮고 퇴근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늘 우리들 책상 위의 노트북은 오픈 상태였다. 잠금화면의 기러기 또는 기하 도형들만 스산히 움직일 뿐이지, 야무지게 노트북을 덮는 일은 자정이 넘어야 꿈꿀 수 있는 일이었다. 


여의도에 있던 은행을 감사하고 저녁에는 용산에 있는 사무실로 돌아와 야근을 하던 5월이었다. 꽃들은 방긋방긋 피고, 공기는 따뜻하고 달콤했다. 그 날도 우리는 그 상큼한 공기를 가누고 저녁을 먹고 사무실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나는 죽어도 다시 그 형광등 불빛 아래로 들어가기 싫었다. 광화문에 가고 싶었다. 거기에 내가 좋아하는 라일락 나무 밑에서 라일락 향기를 실컷 들이키다가, 교보에 들러 이책저책 구경을 하고 집에 가고 싶었다. 그리하여 내가 동료한테 말했다. 

"나, 이대로 집에 갈란다."

"머? 너 컴퓨터는 어떻하고? 가방은?

"가방은 내 맨 아랫 서랍에 넣어줘. 컴퓨터는 너 갈 때 꺼주고. 알았지?"

"보고서 다 썼냐?"

"어차피 오늘 올리나 내일 올리나 용구리 책상위에 며칠 있을텐데 뭐"


나는 저녁을 먹고 나오는 용산시장 야채가게에서 검정 비닐봉투를 하나 얻어서 거기에 지갑과 핸드폰을 넣고 그렇게 검정봉투를 들고 퇴근해버렸다. 

그 이후로도 몇번 달콤한 꽃바람을 콧구멍에 슝슝 넣으며 정상인들처럼 밝을 때 퇴근하고 싶은 욕구가 꿈틀거릴때 나는 검정봉지를 들고 퇴근을 했다. 내 세번때 서랍에는 가방 뿐 아니라 검정 봉지가 몇개 들어있어서, 나는 그렇게 검정봉지에 간식을 들고 들어오거나 나가는 사람인 척을 해가면서 퇴근을 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이 없는 일들이다. 자정이 넘어서야 퇴근하는 일이 당연시되고, 그 전에 퇴근을 하는 것이 죄악시 되었던 시절. 나의 검정봉지 퇴근은 몇명에게 소문이 나서 나를 따른 검정봉지 부대가 생기기도 했다. 검정봉지 부대는 시간차를 두고 저녁을 먹으러 나가서 다시 사무실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서로 돌아가며 검정봉지를 들고 나간 동료의 컴퓨터를 조용히 꺼주고 퇴근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건데, 이것은 일을 하기 싫어 꾀를 부려 게으름을 부린 농땡이 짓이라고 볼 수 없다. 

그당시 우리의 높으신 분들이 알았다면, 이 농땡이들! 하고 호통을 치고 인사고과에 반영을 했을지 모르지만, 

이것은 우리의 정당방위였다고 볼 수있다.

그렇게라도 어쩌다 가끔씩이라도 콧구멍에 밝은 세상의 훈훈하고 달콤한 바람을 넣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그 많은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을까? 

살기 위한 발버둥, 나를 지키고자 한 정당방위, 한걸음 나아가기 위한 한걸음 빠른 퇴보, 이것이 내가 부린 농땡이고, 이 농땡이가 그 고된 시간을 버티게해 준 힘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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